대유행(판데믹) 단계에 접어든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 전 세계가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지금, 국내 의료계에는 때아닌 원격진료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코로나19 사태에 따라 복지부가 원격진료를 한시적으로 허용했기 때문이다. 복지부는 지난 2월 22일 ‘의사의 판단에 따라 안전성 확보가 가능한 경우 환자가 의료 기관을 직접 방문하지 않고도 전화 상담 및 처방을 받을 수 있도록 한시적으로 허용’한다고 밝혔다.
복지부 보도자료 중 일부
한국 의료계에서 ‘원격진료’는 일종의 금기어와 다름 없다. 여러 이유로 인해 그 단어만으로도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전 세계에서 원격진료를 ‘전면적’, ‘명시적’으로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는 국가는 사실 한국밖에 없는 실정이다. 전면적, 명시적이라는 두 전제 조건을 단 이유는, 국가에 따라 초진은 대면진료를 의무화한 곳도 있고, 또 관련해서 명시적인 법규가 없는 국가도 있기 때문이다.
원격진료로는 검체 체취 등을 할 수 없으므로 감염병 진단은 불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로나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원격진료를 허용하는 논리는 간단하다. 환자 간, 그리고 환자와 의료진 간의 접촉을 줄여서 감염의 위험을 낮추기 위함이다.[1, 2, 3] 감염이 의심되는 경우 환자가 곧바로 병원이나 보건소를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전화나 화상 통화를 통해 환자를 선별(triage)한 다음 꼭 필요한 경우에만 병원을 방문하게 할 수 있다. 또한 만성질환 등으로 진료를 받아야 하지만, 감염에 대한 걱정 때문에 병원을 방문을 꺼리는 환자에게도 원격 진료가 유용할 수 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비해서 원격진료를 대폭 확대하는 것은 미국과 영국 등 다른 국가도 마찬가진다. 지난 2월 말 미국 원격진료 협회(American Telemedicine Association) 및 의료정보경영학회(HIMSS) 등은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비해서 원격진료에 대한 국민건강보험인 메디케어의 적용을 확대해달라고 요청했다.[1, 2] 의료인들에게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처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 (as many tools as possible)’을 제공해달라는 요구였다. 이러한 요청에 곧바로 의회가, 그리고 연이어 트럼프 대통령이 신속하게 승인했다.
영국도 마찬가지다. 3월 초, 코로나19에 대처하기 위해서 영국의 국영 건강보험인 NHS는 1차 병원의 진료를 가능하면 모두 원격으로 하라고 권유하기 시작했다. 영국에는 연간 1차 병원의 진료가 3억 4천만 건에 이르며, 기존에는 영상통화로 이뤄진 경우는 1%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1차 병원 진료의 5%만이라도 원격으로 이뤄지면, 주당 30만 건의 대면 진료를 줄일 수 있으므로 감염의 가능성도 작아질 것이라는 계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지부의 이번 원격진료의 한시적 허용이 졸속이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원격진료를 시행하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도 없이, 무턱대고 허용부터 해버렸기 때문이다. 원격진료는 대면진료에 비해 진료 방식이 다르고, 한계점도 명백하다. 따라서 일선 진료 현장에서 혼란과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서는 충분한 준비와 이해관계자들과의 협의도 필요했다.
원격진료를 하기 위해서는 환자 본인 확인, 진료비 청구 및 수납, 처방전 발송 및 수령, 의약품 수령 등의 프로세스가 완전히 새롭게 필요하다. 하지만 의료 현장에서는 이러한 프로세스도, 인프라도, 원칙도 전혀 갖춰져 있지 않았다. 더 나아가, 정부의 지침에는 세부적인 기준 없이, ‘의사의 판단에 따라’, ‘의료 기관과 환자가 협의하여’, ‘환자와 약사가 협의하여’ 정도로만 모호하게 기술되어 있다. 각자 알아서 하라는 말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구체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원격진료의 일방적 허용은 현장에서 혼란만을 야기할 뿐이다.
다행히 일선 스타트업 등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원격진료 플랫폼을 개발하여 의사와 환자에게 무료 배포하는 등 간극을 메우기를 자처하고 있다.[1, 2, 3] 하지만 이런 과정은 원래 정부가 미리 조율해야 하는 것이었다. 앞서 언급한 영국 NHS의 경우 원격진료를 대규모로 확대하기 위해서 PushDoctor, Babylon, Docly, Visiba 등의 헬스케어 테크 회사들과 협업을 논의하면서 진행 중이다. 준비 없이 무작정 허용하고 뒷짐지고 있는 국내 부처의 모습과는 대비되지 않을 수 없다.
복지부가 원격진료를 준비없이 허용하자, 민간회사들이 자발적으로 플랫폼을 개발하고 무료 배포하며,
간극을 메우고 있다. 사진은 DHP 포트폴리오인 메디히어에서 공개한 원격진료 플랫폼
한국에서 원격진료는 너무도 복잡한 문제이다. 일각에서는 이번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원격진료를 국내에서도 전면적으로 합법화해야 한다는 성급한 주장도 들린다. 하지만 이는 결코 그렇게 접근할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현재는 워낙 비상시국이라 예외적인 상황이지만, 원격진료와 같은 복잡한 문제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모든 국가는 특유의 의료 시스템을 가지며, 각 국가의 규제는 그러한 특수성을 반영한다. 한국의 원격진료 규제도 마찬가지다. 원격진료 이슈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의료전달체계나 급여 체계와 같은 더욱 고질적이고도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이 선행되어야 한다. 여기에 정부와 의료계 사이의 뿌리깊은 신뢰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상황에서 한국에서도 금기로만 여겨지던 원격진료가 한시적으로라도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시행이 앞으로 한국 의료의 앞날에 어떤 영향을 줄지 예측하기란 어렵다. 또 한 편으로는 우리도 외국처럼 원격진료에 대한 경험이나 원칙이 있었더라면, 이러한 상황에서 좀 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에서는 다른 모든 것은 차치하고서, 원격진료가 코로나 사태를 하루라도 빨리 진정시키고, 환자와 의료진의 건강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