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30th November 2024,
최윤섭의 디지털 헬스케어

디지털 치료제, 혁신인가 거품인가?

  • 제가 최근에 한국경제신문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글자수 제한 때문에 축약해서 기고했던 글의 원문을 올려드립니다. 제 칼럼은 여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최근 국내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에서는 소위 ‘디지털 치료제’라는 키워드가 급격하게 부상하고 있다. 영어로는 디지털 테라퓨틱스(digital therapeutics)로 불리는 이 분야는 스마트폰 앱, 게임, VR, 챗봇과 같은 소프트웨어를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약처럼 사용하는 것이 골자다. FDA나 식약처 같은 규제기관에서 질병 관리나 치료 목적의 의료기기로 인허가받은 소프트웨어를, 필요에 따라서는 의사가 처방하고, 또 의료 보험도 적용되는 것이다.

최초의 디지털 치료제로는 2017년 미국 FDA로부터 중독치료용 소프트웨어 의료기기로 허가받은 페어 테라퓨틱스의 애플리케이션 리셋(ReSet)이 꼽힌다. 그 이후로, 전 세계적으로 당뇨병, 우울증, 불면증, ADHD, PTSD, 비만, 치매, 자가면역질환 등과 같은 다양한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디지털 치료제의 개발이 앞다투어 시도되고 있다. 한편, FDA도 이런 새로운 의료기기와 관련한 규제를 발 빠르게 정비하고 있다.

디지털 치료제는 치료제라는 개념의 확장으로도 볼 수 있다. 기존에는 약을 저분자 화합물(small molecule), 항체와 같은 생물학적 제제(biologics), 그리고 세포치료제 등으로 분류했다. 이러한 약의 분류에 이제 ‘디지털 치료제’라는 완전히 새로운 카테고리가 추가되어야 한다고 이 분야 사람들은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최근 몇 년 동안 다국적 제약사들이 이 분야에 활발하게 진출하고 있기도 하다.

국내에서는 이 분야가 지난 몇 년 동안은 전혀 거론되지 않다가, 작년 하반기부터 무슨 이유에서인지 급격하게 주목받고 있다. 최근에는 공중파 9시 뉴스에 등장할 정도로 (필자도 인터뷰에 응해서 신중론을 말씀드렸던 것이 전파를 탔다) 언론에도 많이 등장하고 있으며, 관련 분야에 진출을 선언한 스타트업도 늘어났으며, 산자부 등 정부 유관 부처에서도 연구 과제를 만드는 등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필자는 장기적으로는 디지털 치료제의 전망을 낙관하는 편이다. 디지털 치료제가 기존의 치료제 대비해서 가지는 장점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이므로 개발 기간과 비용이 상대적으로 적게 들어갈 수 있다. 침습적이거나, 체내에서 직접 작용하는 것이 아니므로 부작용의 가능성도 상대적으로 낮다.

특히, 디지털 치료제는 확장성이 거의 무한대에 가깝다. 알약을 수백만 명에게 배포하기는 어렵지만, 디지털 치료제는 앱만 다운로드 받는다면 수백만 명에게 동시에 약효를 제공할 수도 있다. 일례로, 작년 5월 영국의 국영 건강보험 NHS는 불면증 치료용 디지털 치료제인 빅헬스의 슬립피오(Sleepio)를 런던 시민 등 영국인 1,000만 명이 사용할 수 있도록 사용료를 지불하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치료제에 관해서는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아직 의학적으로, 산업적으로 증명된 바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디지털 치료제도 기존 약과 같이 임상시험을 거쳐서 약효와 안전성을 입증하고, (개발사의 사업 전략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규제 기관의 인허가를 받아야 하며, 보험 적용을 받기 위해서 보험사를 설득해야 한다. 또한 의사가 처방을 해줘야 하며, 더 나아가 환자가 정말로 사용을 해줘야 한다.

보험사가 ‘치료용 게임’의 사용에 대해 보험료를 줄 것인가? 의사가 기존에 사용하던 약 대신 ‘치료용 VR’을 처방할 것인가? 환자는 약 대신 ‘스마트폰 앱’을 처방받으면 정말 잘 사용할 것인가? 이 질문은 모두 아직 디지털 치료제 분야의 누구도 답하지 못한 영역이다. 사실 최초의 디지털 치료제로 인정받는 리셋 역시 보험사 설득, 의사의 처방 단계에서 고전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다른 대부분의 디지털 치료제들은 심지어 아직 그 단계까지 가지도 못하고 있다.

더 나아가, 앱, 게임, VR 등을 치료에 사용하기 시작하면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부작용이 드러날 수도 있다. 앞서 언급했던, 확장성이 크다는 점은 양날의 검이다. 치료 효과를 수많은 사람에게 쉽게 전달할 수 있지만, 또 반대로 부작용이 전례 없는 규모로 크게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임상 시험 디자인을 엄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디지털 치료제의 유효성과 안전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대조군을 어떻게 설정할 것이며, 임상 프로토콜은 세부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업계에서 고민하는 문제다.

다른 분야가 그러하듯 의료 분야도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소프트웨어가 치료 영역으로 확장되는 디지털 치료제 분야의 전망이 장기적으로 밝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 분야가 아직 초기일 때 많은 자원을 집중적으로 투입해서 글로벌 시장을 선점하는 전략이 좋을 수도 있다. 이미 기존의 치료제 분야에서는 외국의 다국적 제약사가 주도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국내에서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디지털 치료제 붐을 보면 자꾸만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디지털’과 ‘치료제’가 결합된 개념이 팬시하고, 외국에서 유망 사례가 소개된다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과도한 관심을 받는 것 같기 때문이다. 충실하게 기본을 지켜서 개발하고 있는 연구자와 회사도 있지만, 그저 핫한 키워드에 따라 말만 앞서는 곳도 있다. 글로벌에서 통용되는 디지털 치료제의 개념과 범주에 해당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무작정 키워드만 가져다 붙이는 곳도 적지 않다.

아무리 유망한 분야라고 하더라도 충분한 이해와 준비가 동반되어야 한다. 특히 사람의 건강과 생명을 다루는 분야라면 말이다. 디지털 치료제라는 유망한 신규 분야에 한국에서 관심을 빠르게 가지게 된 자체는 분명 긍정적인 일이다. 이러한 관심이 장기적으로 건강하게 유지되어, 디지털 치료제가 단순한 버즈 워드(buzz word)에 그치지 않고, 향후 의학적, 산업적인 성과로도 이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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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he Author

디지털 헬스케어를 통해 의료를 혁신하고 세상을 더 건강하게 만들고자 하는 벤처투자자, 미래의료학자, 에반젤리스트입니다. 포항공대에서 컴퓨터공학과 생명과학을 복수 전공하였고, 동대학원에서 전산생물학으로 이학박사를 취득했습니다. 스탠퍼드 대학, 서울대학교병원 등에서 연구하였습니다. 현재 디지털 헬스케어 스타트업 전문 투자사, 디지털 헬스케어 파트너스 (DHP)를 2016년에 공동창업하였고,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여 개의 디지털 헬스케어 스타트업에 투자하였습니다. 네이처의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 자매지 『npj 디지털 메디슨』의 편집위원이자, 식약처, 심평원의 전문가 협의체 자문위원입니다. 『디지털 헬스케어: 의료의 미래』 『의료 인공지능』 『헬스케어 이노베이션』 등을 집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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