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의 디지털 헬스케어 업계에서는 큰 뉴스가 있었습니다. 미국 최대의 PBM(Pharmacy Benefit Manager) 중 하나인 Express Scripts에서 무려 ‘Express Scripts Digital Health Formulary’ 를 발표했습니다. 이 ‘Digital Health Formulary’에는 당뇨병, 심혈관, 폐질환, 정신건강 등의 4개의 카테고리에 대해서 Livongo, Omada, Propeller 등의 15개 서비스가 포함되었습니다. 서비스의 종류로 보자면, remote monitoring, 그리고 digital therapeutics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한국에는 좀 낯선 개념이지만, 미국의 (비효율적인 의료 시스템에서) PBM은 보험사, 병원, 약국, 제약사, 환자 들의 이해관계자들 중간에서 서로를 조율하는 독특한 역할을 합니다. ‘국민건강보험’이라는 단일 보험으로 운영되는 한국과 달리 미국은 보험체계가 아주 복잡하고 이해관계자(stakeholder)들도 많습니다. 여기에서 PBM은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 일종의 ‘중개인(middle man)’과 같은 역할을 하는데요. 구체적으로는 약국, 보험회사 및 제약사에서 다루는 처방약 관련 비용을 최적화함으로써, 환자가 부담해야 할 비용을 줄이면서도 의료 서비스의 질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역할을 가지고 있습니다. (PBM에 관해서는 여기에 아주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특히, PBM은 보험사의 적용 범위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특히 PBM이 만드는 formulary 는 특정 질환에 대해서 선호되는 처방약 리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효과, 비용 등을 만족시키는 약제를 위주로 짜게 되는데, 의료진의 처방 데이터, 분석, 자문, 사회 경제적 비용을 토대로 한다고 합니다.[ref] 그런데 미국 최대의 PBM인 Express Scripts에서 보험사 등에 ‘이러한 디지털 헬스케어 서비스는 정확하고, 비용 효과성 있고, 사용성도 좋다’고 공식적으로 권고하는 리스트(formulary)를 만든 것입니다.
이는 디지털 헬스케어 산업에 있어서 큰 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지털 헬스케어는 기술의 발전이나 그 화제에 비해서 아직 큰 비즈니스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핵심 요인 중의 하나는 바로 ‘돈을 낼 주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국내외를 막론하고 민간 보험사에서는 아직 여러 이유로 디지털 헬스케어 관련 서비스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망설여왔습니다만, 이번 Express Scripts의 결정으로 미국의 디지털 헬스케어 산업은 큰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미 지난 5월에 Express Scripts는 이렇게 디지털 헬스케어 툴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것을 결정하고 선별하는 작업을 시작했다고 밝힌 바 있는데요.[1, 2] 이번에 보도자료를 낸 바에 따르면, 수백 개 서비스의 submission을 받아서 총 3 단계에 걸쳐서 최종 15개로 추려내었습니다. 그 3단계는 아래와 같습니다.
- Step 1. Clinical Research: 의사, 약사, 관련 분야 박사들이 관련 툴의 임상 연구에 대한 방법, 주장, 임상적 유효성 등을 검증
- Step 2. Usability: 사용자 경험 전문가들이, 툴이 얼마나 사용자 친화적인지 (데이터 모터링, 동기화 등등), 접근성이 좋은지 등을 검증
- Step 3. Financial Value: Express Scripts의 사이즈, 스케일, 시장 포지셔닝 등을 고려하여, 재정적 가치를 평가.
즉, 임상적 근거, UX, 비용 효과성 등을 세밀하게 검증한 것입니다. Express Scripts는 현재 시장에 3만 개 이상의 디지털 헬스케어 서비스가 있는데, 각 보험사들이 이런 툴을 모두 각자 평가할 리뷰 프로세스나 리소스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자기가 이런 역할을 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항상 강조하는 것이지만, 결국에는 evidence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환자들이 이 서비스를 얼마나 잘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사용성(usability)도 중요합니다. 특히, 고령층 환자의 경우 스마트폰 앱과 같은 디지털 툴의 사용에 서투른 경우가 많기 때문에, UX 등을 고려하여 사용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나오게 된 것이 위의 표에 나오는 4가지 카테고리의 15개 디지털 헬스케어 툴입니다. 당뇨병 (제 1형, 2형 및 당뇨 예방), 심혈관계 (고혈압), 폐질환 (천식, COPD), 그리고 정신건강 (우울증, 불안장애, 불면증) 4가지 카테고리입니다. 여기에 권고되는 툴은 대부분 시장에서는 잘 알려진 이름입니다. 예를 들어, 당뇨병에 대해서는 우선적으로 올해 IPO를 진행하기도 했던 리본고(Livongo Health) 가 권고되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는 오마다 헬스(Omada Health) 및 웰닥의 블루스타 플랫폼에서 돌아가는 라이프스캔의 원터치 리빌(LifeScan’s OneTouch Reveal)이 권고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근거와 사용성을 잘 갖추고 있는 눔 (당뇨예방), 빅헬스의 슬리피오(Sleepio) (불면증) 등이 이 리스트에 빠진 것이 좀 놀랍기도 한데요. 내년에 이 리스트는 계속 추가될 것이라고 하니 앞으로 더 많은 툴이 formulary에 추가될 것을 기대해볼 수 있겠습니다. (이번 첫번째 리스트를 Express Scripts에서는 ‘The First Cohort’ 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즉, 향후 두번째 코호트가 나올 수 있겠지요.) (그리고 보도자료 본문에는 15개라고 나오는데, 위의 테이블 및 다른 기사에도 15개 전체가 언급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눔, 빅헬스 및 다른 툴이 이번에 포함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나머지 리스트가 궁금하네요..)
또한 Express Scripts는 단순히 이런 리스트를 권고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고객사에서 15개 중에 어떤 tool 을 채택하는 것이 적합한지 선택하고, 환자들이 이런 솔루션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약사들의 역할에 확장이 있을 것이다’라고 언급하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DTx 때문에 약의 범주가 확대되고 있는 것처럼) 이번 변화로 인해서 약사들이 디지털 헬스케어 프로그램이나 상품에 대한 일종의 ‘복약지도’를 해야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PBM의 원래 역할이 formulary를 통해 권고 처방약 리스트를 만드는 것이었지요.) 이러한 사례로 Express Scripts의 pulmonary specialist pharmacist 의 지원으로 Propeller Health의 스마트 인헤일러 툴을 사용한 결과 rescue inhaler의 82% 감소, adherence가 10% 증가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결국 변화는 민간 보험사에서 이러한 PBM의 권고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때에 시작됩니다. 다만, PBM 수준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앞으로 지속될 것입니다. 지난 9월 NYT 등의 보고에 따르면, 또 다른 대형 PBM인 CVS Health에서도 불면증 DTx인 Big Health의 권유를 고려하고 있으며, Express Scripts가 1차 Formulary 를 내어놓은 이상, 업계에서는 이 bar를 충족시키려는 노력을 가열차게 하게 될 것입니다. Express Scripts와 CVS Health는 각각 미국에서 시장 점유율 20-30% 내외를 차지하는 선두 회사이며, 이들을 통해서 보험을 보장 받는 인구의 규모는 수백만 명 단위입니다. 즉, 이러한 PBM을 통해서 미국 인구 수백만 명에 디지털 헬스케어 서비스가 적극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직 한국은 이런 변화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심평원은 당연히 이런 서비스의 채택에 보수적이고, 민간 보험사도 아직은 과감한 움직임에 주저하고 있습니다. 다만 최근 건강증진형 보험상품에 대한 가이드라인도 전향적으로 개정되고 있으며, 몇몇 보험사들은 물밑에서 이 분야를 계속 공부하고 있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그 과정을 촉진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고요. 이런 경우 변화를 만들기 위해서 벤치마킹할 수 있는 ‘선례’가 있는 것이 중요한데, 그런 의미에서 이번 Express Scripts의 사례가 큰 역할을 하지 않을까 합니다.
Express Scripts의 이번 ‘Express Scripts Digital Health Formulary’ 는 2020년 1월부터 시행됩니다. 내년에는 글로벌 뿐만 아니라, 한국의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에 더 많은 긍정적인 변화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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