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회도서관 ‘금주의 서평’에 제가 기고한 글입니다. 분량 제한으로 요약해서 보낸 글의 원문입니다.
배드 블러드는 실리콘밸리의 역사에 길이 남을 테라노스와 엘리자베스 홈즈의 역대급 사기 행각의 전말을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자 존 캐리루가 폭로한 책이다. 수많은 내부 고발자들의 증언과 방대한 취재를 바탕으로 테라노스가 어떻게 사람들을 속였으며, 어떻게 거짓말이 끝내 탄로나게 되었는지를 박진감 있게 서술한다.
생명공학이나 스타트업 업계에 일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몇년 전 떠들석했던 테라노스 사태를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테라노스는 ‘피 한 방울로 수많은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실리콘밸리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엘리자베스 홈즈라는 미모의 젊은 여성 CEO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스탠퍼드 대학 화학과를 중퇴하고, 수년 동안 비밀리에 이 기술을 개발했다는 스토리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 회사는 총 1조 5000억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투자를 유치했고, 2015년 기업 가치는 무려 90억 달러까지 치솟았다. 엘리자베스 홈즈는 세계 최고의 자수성가한 여성 부호가 되었다. 실리콘밸리 거물 투자자 팀 드레이퍼, 언론계의 제왕 루퍼트 머독 등의 투자를 받았으며, 전설적인 외교관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조지 슐츠, 해병대 4성장군 제임스 매티스 (나중에 트럼프 정부의 국방장관이 되었다) 등의 쟁쟁한 인물들을 이사진으로 두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테라노스의 주장은 모든 것이 거짓말이었으며, 그런 기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졌다.
필자도 이 테라노스 사태는 왠만큼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책에 밝혀진 전말을 보니 실제 사건은 훨씬 더 심각했다. 한마디로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었다. 엘리자베스 홈즈는 처음에 좋은 비전을 가지고 테라노스를 창업했지만, 그 비전을 실현할 기술이 없었음에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러한 기술을 내부적으로 보유하고 있다고 공언했다.
기술의 검증에 대한 요구는 교묘하게 회피하거나 비밀유지계약으로, 혹은 자신의 비전과 개인적인 매력에 매혹된 정부, 국방, 외교, 재계, 언론 등의 고위직의 후광을 등에 업고서 절묘하게 피해나갔다. 사실 홈즈와 테라노스에 매혹된 거물들은 사실 테라노스의 기술과 실현 가능성에 대해 판단할 전문성은 없는 사람들이었다. 대형 약국 체인 월그린즈 계약건에서는 의심을 제기한 전문가도 있었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무마되었다.
갈수록 일은 커졌다. 외부 투자 유치는 늘어나서 테라노스는 생명과학 업계 최고의 유니콘이 되고, 홈즈는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더 유명해졌으며, 월그린 및 세이프웨이 등과의 대형 계약이 성사되면서 결국에는 거짓말이 더 늘어났다. 책에는 이러한 과정에서 테라노스가 억지로 실험 결과를 내기 위해 했던 일련의 프로세스가 나오는데 생물학 실험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면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로 심각하게 문제가 있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경쟁사인 지멘스의 기기를 몰래 가져다 쓰기, 샘플을 과도하게 희석하기, 분석 과정 퀄리티 컨트롤과 샘플 수집 및 보관의 허술성, CLIA 랩 자격 요건 유지를 위해 감사자들에게 거짓말하기, 결과물을 자의적으로 도출하기…)
사실 엘리자베스 홈즈는 대단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포장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온갖 거짓말, 조작, 은폐, 왜곡 등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이 회사는 비밀주의와 공포 경영, 협박으로 굴러갔다. 특히 여기에는 테라노스의 2인자이자, 엘리자베스 홈즈 보다 20살 연상의 비밀 연인인 서니 발와니가 큰 역할을 했다. 어찌보면 이 인간은 홈즈보다 더 질 나쁜 인간이다. 이 둘은 연인관계라는 것을 이사회 등에는 비밀로 했으며, 그 자체로도 부도덕한 일이다.
이러한 회사의 문제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거나, 경영진에게 충성하지 않거나, 눈밖에 나면 그 자리에서 해고당해서 소리 소문 없이 회사에서 사라졌다. 비밀유지 계약을 철저히 맺었으므로 내부 사정의 발설도 어려웠다. 내부 고발자에게는 (악질 변호사 군단을 동원해) 악랄한 법적 수단, 협박, 감시, 미행 등을 동원해서 공포감을 주고 재정적, 직업적으로 파멸시키려 했다. 때문에 회사에 내부적인 문제가 그토록 많았음에도 테라노스는 비교적 오랫동안 사기 행각을 이어올 수 있었다.
아쉽게도 책에서 자세히 나오지 않는 부분은 대체 엘리자베스 홈즈가 이런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은 사기극을 왜 지속했느냐 하는 것이었다. 좋은 비전을 가지고 시작했지만, 실제로 그 비전을 이룰 과학적 전문성은 없었다. 그녀는 회사에 자기가 주장한 기술이 없으며, 단기간 내에는 구현되지 못할 것임을 그녀 자신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엄청난 매력, 비전, 전달력, 이미지 등으로 다수의 고위 관계자를 마치 최면을 건 것처럼 매혹시키고, 언론의 조명을 받자 화려한 스타 CEO로서의 스포트라이트를 만끽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공공 석상에서도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고, 자신에게 충성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순식간에 돌변해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서슴지 않았다. 일부러 (자신의 원래 목소리를 감추고) 굵고 낮은 바리톤의 목소리를 내는가하면, 그러면서도 스티브 잡스를 추종해서, 검정 터틀넥 셔츠만 입고, 개발 중인 기기에는 (당시 최신 아이폰에 붙던) 4S 라는 코드 네임을 붙이고, 애플과 같은 광고 대행사를 썼다. 잡스처럼 현실왜곡장을 만들려는 듯 말할 때는 눈을 거의 깜빡이지 않았다.
저자 캐리루는 엘리자베스 홈즈가 소시오패스 같다는 이야기를 넌지시 하고 있다. 사람들의 건강과 생명에 심각한 위험이 될 수 있는 일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진행하였고 (실제로 테라노스 검사 결과의 오류로 피해를 본 사람도 많았다) 오히려 그러한 문제를 외적인 방식으로 무마하려고만 했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정신과 전문의들은 이 책을 읽고 홈즈에 대해 어떤 판단을 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존 캐리루는 책을 집필을 위해 수백 명의 내부 고발자를 취재했지만, 당연하게도 엘리자베스 홈즈는 이 책에 코멘트하기를 거절했다. 홈즈가 수년에 걸쳐 이런 일을 벌인 진짜 동기는 정말 무엇이었을까. 이 책의 출간 이후에 테라노스의 결국 시가총액은 0원이 되었고, 홈즈는 향후 10년 동안 어떤 상장사의 대표직도 맡지 못하게 되었으며, 이제는 법정에 불려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홈즈는 소송 증언 과정에서 ‘I don’t know’를 600번 이상 말했다고 한다. 이를 보건대 아마 홈즈의 진짜 동기는 영원히 묻히게 될지도 모르겠다.
‘배드 블러드’는 경영, 투자, 인간관계 등에 여러 교훈을 얻을 수도 있는 책이지만, 또 한 편으로는 이 사례가 너무 예외적이고 극단적이며 비상식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생명과학/헬스케어 분야 연구, 사업, 투자를 하시는 분들은 한 번쯤 읽어봐야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때로 현실은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그런 인간의 역사는 또 반복되기 마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