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의 헬스케어 생태계를 논할 때, 헬스키트와 함께 언급해야 할 또 하나의 플랫폼은 바로 애플 헬스 레코드(Apple Health Record)이다. 애플 헬스 레코드는 개별 병원의 전자의무기록(EMR)에 저장된 진료 기록, 처방 기록, 진단검사(lab test) 결과, 예방 주사 기록 등을 환자가 자신의 아이폰으로 받아올 수 있게 한다. 아이폰에 저장된 데이터는 ‘건강’ 앱의 가장 오른쪽에 있는 ‘의료 정보’ 탭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전에 여러번 강조한 적 있는, 헬스키트가 환자 유래의 의료 데이터를 아이폰을 기반으로 통합하는 플랫폼이라면, 이 애플 헬스 레코드는 병원에서 측정되는 (전통적인 의미의) 의료 데이터를 아이폰을 기반으로 통합하는 플랫폼이다. 전문 용어로는 이러한 애플 헬스 레코드와 같은 플랫폼을 ‘개인 건강 기록(Personal Health Record, PHR)’이라고 한다.
아이폰 기반의 진료 기록 관리
전자의무기록의 호환성(interoperable) 문제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A와 B라는 병원이 서로 다른 회사의 전자의무기록 시스템을 사용한다고 가정해보자. 내가 A라는 병원에서 진료받고 처방 받은 데이터를, B라는 병원에서 진료 받을 때는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 호환성 문제이다. 기존에는 A와 B의 병원에서 사용하는 전자의무기록을 직접 서로 호환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시도를 하였으나, 애플은 이 문제를 좀 다른 방식으로 풀었다. 바로 중간에 아이폰 기반의 매개체를 둔 것이다.
즉, 애플이 아이폰을 기반으로 A병원의 전자의무기록과 B병원의 전자의무기록에 모두 연동해놓았다고 해보자. 그러면 환자가 A병원에서 자기 데이터를 받아와서 아이폰에 저장해두었다가, B병원에서 진료받을 때 의사에게 아이폰에 저장된 기록을 보여주거나, 혹은 B병원의 전자의무기록에 전송할 수 있다. 반대로 B병원의 데이터를 A병원으로 공유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러한 매개체가 바로 애플 헬스 레코드이다.
애플 헬스 레코드 구조도
(출처: 최윤섭 디지털헬스케어 연구소)
애플 헬스 레코드와 연동되는 병원은 출시 직후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애플은 이 플랫폼을 2018년 1월에 출시하였는데, 출시 당시에는 존스홉킨스, UC샌디에고 등 12개의 병원이 연동되었으며 [ref], 출시 후 두달이 지난 3월에는 연동된 병원이 스탠포드와 듀크 대학병원을 포함하여 39개로 늘어났다 [ref]. 8월에는 75개 병원으로 늘어났으며, 2019년 2월 현재 애플의 홈페이지에 따르면 200여개의 병원이 애플 헬스 레코드에 연동되어 있다.
더 나아가, 애플은 2019년 2월 미국의 퇴역 군인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미국국가보훈처(Veterans Affair)와도 연동을 결정했다고 발표했다.[ref] 이 연동이 성사됨에 따라서 900만명에 달하는 미국의 퇴역 군인들이 애플 헬스 레코드를 통해 자신의 의료 기록을 아이폰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애플은 왜 다른가?
사실 거대 IT 회사가 환자 본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데이터를 관리할 수 있는 개인 건강 기록(PHR) 플랫폼을 내어놓은 것은 애플이 결코 처음이 아니다. 2007년에는 마이크로소프트가 MS 헬스볼트라는 서비스를 시작했고, 2008년에는 구글이 구글헬스라는 PHR 서비스를 시작했다. 하지만 헬스볼트는 지금까지도 별다른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고, 구글헬스는 3년 동안 10여개 정도의 병원만 연동되는 등 지지부진하다가 결국 서비스를 중지했다.[ref]
이렇게 과거에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이 성공하지 못한 시장에서 왜 애플은 빠르게 확장하고 있는 것일까? 결국 스마트폰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ref]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이 이 시장에 뛰어들던 2007, 2008년만 하더라도 최초의 스마트폰인 아이폰이 갓 출시된 시점으로, 앱스토어를 통틀어서 앱이 100여개 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헬스/피트니스 앱만 수천 개가 넘는다)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의 플랫폼은 스마트폰이 아니라 웹 기반이었기 때문에 플랫폼의 활용성과 확장성에 많은 제약이 있었고, 사용법도 스마트폰처럼 직관적이지 않았다.[ref]
MS 헬스볼트. 웹 기반의 플랫폼이다. (출처: VentureBeat)
2019년 1월 미국의학협회지(JAMA)에 보고된, UC샌디에고 병원의 환자들의 경험에 따르면 이러한 애플 헬스 레코드의 장점이 잘 드러난다.[ref] UC샌디에고는 애플 헬스 레코드의 출시 때부터 도입한 12개 병원 중의 하나로, 연구자들은 환자에게 이 플랫폼이 얼마나 사용하기 쉽고, 도움이 되는지 세 가지 질문을 던져 조사해보았다. 이 플랫폼을 다운로드한 환자는 425명이었으며, 이 중 132명이 답변을 했다.
- 스마트폰을 활용하여 이 플랫폼에 쉽게 접속 가능함: 96%
- 이 플랫폼의 기능에 만족함: 78%
- 이 플랫폼이 자신의 건강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고, 의사와의 대화를 촉진시키며, 자신의 건강 정보를 친구나 가족과 더 공유하고 싶어짐: 90%
이와 같이 높은 비율의 환자가 애플 헬스 레코드를 사용하기에 편리하게 느끼고 있으며, 기능에도 만족하고, 본인의 데이터를 스스로 관리함에 따라서 환자 자신의 건강에 대한 이해도 높아지고 있다고 답변하고 있다. 다만 논문에서도 지적하듯이, 애플 헬스 레코드가 궁극적으로 환자의 치료 결과를 향상시키는지, 의료 서비스의 질은 유지하면서도 의료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애플 헬스케어 생태계의 양대 플랫폼
이로서 애플은 환자 유래의 의료 데이터(Patients Generated Health Data)를 통합할 수 있는 ‘헬스키트’와, 병원에서 생산되는 전통적인 의미의 의료 데이터를 통합할 수 있는 ‘애플 헬스 레코드’를 모두 갖추게 되었다. 이 두 플랫폼을 통해서 ‘모든’ 의료 데이터를 모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 사용자를 대상으로 한 대규모 서비스 중에서 현재 애플에 비견할만큼 방대한 종류의 데이터를 통합할 수 있는 곳은 전무하다.
애플 헬스키트 구조도
(출처: 최윤섭 디지털헬스케어 연구소)
애플은 이러한 플랫폼에 축적되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직접, 혹은 다른 회사와의 연계를 통해서 다양한 의료 서비스를 아이폰 사용자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토대를 차근차근 갖춰나가고 있다. 예를 들어, 환자가 의사를 우버처럼 자신이 있는 곳으로 부르는 왕진 서비스를 제공하는 힐(Heal)과 연동했다.[ref] 기존에는 이 서비스를 통해 집에서 의사를 부르더라도 이 의사가 진료에 참고할 수 있는 진료 기록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제공할 수 있는 의료 서비스에도 제약이 있었다. 하지만 환자가 애플 헬스 레코드에 저장해놓은 과거 진료기록을 왕진하러 온 의사에게 공유해주면, 이를 바탕으로 더 효과적인 진료를 집에서 받을 수 있다.
이렇게 애플의 헬스케어 플랫폼과 연동되는 부가 서비스는 갈수록 더 늘어날 것이다. 더 많은 데이터가 축적되고, 더 많은 병원과 부가 서비스가 이 플랫폼에 연동될수록 플랫폼의 유용성을 증가시킴과 동시에, 이 자체가 진입 장벽이 되어 다른 후발 주자들이 이 시장에 진출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들 것이다.
또 한 가지 강조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애플의 의료 생태계에서 모든 데이터의 흐름은 사용자(환자) 본인이 컨트롤하게 된다는 점이다. 헬스키트에 통합된 데이터는 먼저 아이폰 내부에 저장된다. 이 데이터를 아이폰에 설치된 다른 앱이 접근할 수 있거나, 클라우드 등 외부에 저장할지를 결정하는 주체는 바로 사용자 본인이다.
마찬가지로 애플 헬스 레코드에서도 병원에서 데이터를 아이폰으로 받아올지 여부, 이렇게 받아온 데이터를 또 다른 병원에 공유할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 역시 전적으로 사용자 본인이다. 환자 유래의 의료 데이터의 소유권을 환자가 온전하게 가지게 됨으로써 환자의 역할과 권익이 커진다. 이러한 환자의 권한 강화 기조는 애플 헬스키트와 애플 헬스 레코드의 플랫폼의 근간에도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