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9일에 문재인 대통령이 분당서울대병원 헬스케어혁신파크를 깜짝 방문하여 의료기기 규제 개선 방안을 발표하면서, 관련 업계가 떠들썩하다. 필자도 사전에 초청을 받아 현장에서 대통령의 발표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사실 필자는 대통령이 방문하기 직전 의료기기 행사에 연자로 초청 받아 업계 동향 및 현안 등 대한 짧은 발표를 했다. 연자로 섭외될 때부터 보안이 심상치 않았고 주위 사람들의 귀띔이 있어서 ‘설마’ 했는데 정말 대통령이 방문할 줄은 몰랐다.
대통령이 직접 의료기기 산업 분야의 세부적인 문제점들을 언급하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 있으려니 감회가 새롭기도 했다. 이 분야에서 일하는 실무자들 사이에서 이야기할 때나 나오는 용어들, 불만들 등이 대통령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또한 그동안 필자를 포함한 여러 전문가들이 의료 혁신 분야의 규제 개혁 필요성을 외쳤던 것이 헛되지 않은 것 같아서 보람이 느껴지기도 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이번 정부의 주요 현안 중의 하나로 규제 개혁이 꼽힌다. 특히 지난달 27일 ‘준비 미흡’을 이유로 규제혁신 점검 회의를 전격 취소하면서 공직 사회에 경고 시그널을 보낸 이후, 첫 규제 혁신 현장 방문이 바로 이 의료기기 산업이었다. 또한 규제 개혁이 지지부진 하자, 우선 집중할 분야로 의료 기기 분야를 직접 챙겼다는 후문도 들린다.
이 자리에서 발표한 내용은 당연히 남이 써준 것이겠지만, 이 분야의 실무자들이 이번 발표에 대해서 기대감을 감추지 않는 이유다. 대통령이 현장을 직접 방문하고, 변화되어야 할 사항들에 대해서 조목조목 직접 언급하는 것만으로 이제 그동안 소위 복지부동하던 관련 부처 공무원들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장에는 복지부 장관, 보험급여과장, 심평원장, 보건산업진흥원장 등등이 참석했으며, 복지부 장관은 대통령 발표에 앞서 규제 개혁 의지를 다시 한번 강조하기도 했다.
특히 대통령의 발표와, 뒤이어 이어진 루닛 등 관련 업계의 발표와, 이후 뷰노, 힐세리온, 네오펙트 등 업계 부스 방문 시에도 입을 모아 말한 것이 심평원, 신의료기술평가와 같은 중복 규제였다. 작년 말 규제 해커톤에서도 심평원은 식약처 및 업계 실무자들의 토론에서도 자신의 입장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고 한다. 업계에서는 심평원과 보건의료연구원(NECA)에 대한 불신이 너무도 높은지는, 심지어 이번에도 ‘대통령이 바꾸라고 해도 심평원은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까지 평하는 관계자도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업계에서는 ‘우리가 한두 번 속았냐’, ‘규제 개혁 이야기는 예전 정부에서도 똑같이 있었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결국은 실행이 문제다. 이제 대통령이 직접 외부 발표까지 하면서 바뀌어야 할 부분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했으니 (예를 들어, ‘시장 진입 기간을 80일 이하로 줄이겠다’) 그동안 움직이지 않던 복지부, 식약처, 심평원, NECA 등 관련자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이번에는 과연 얼마나 바뀔지 지켜볼 일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필자는 이번 변화에 환영하는 편이다. 이번 발표는 디지털 헬스케어가 아닌 의료기기 특히 체외진단기기(IVD)와 관련된 부분이지만, 인공지능 등 디지털 헬스케어에 해당하는 부분도 많았다. 행사에 초청된 기업도 루닛, 뷰노, 네오펙트, 힐세리온 등 디지털 헬스케어 스타트업이 대부분이었다.
다만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대통령이 이번에 방향성은 제시했으며, 그 방향성에는 상당 부분 동감한다. 하지만 이 변화를 어떻게 이뤄낼 것인지, 그런 변화를 실제로 만들어낼 준비는 되어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은 빠져 있다. 물론 이는 실무자들이 채워 넣어야 할 부분이지만 이 부분에서 규제 개혁의 성패나 향방이 바뀔 수 있다.
규제 혁신은 결코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수많은 이해관계자가 얽혀 있고, 짧은 문구 하나가 엄청난 파급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하물며 의료 기기에 대한 규제 변화는 결국 환자의 건강과 생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항상 강조하는 바이지만, 의료 혁신이 규제 때문에 너무 늦게 환자에게 도달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만, 오히려 규제가 너무 낮아져서 검증되지 않은 기술이 환자에게 제공되는 것 또한 문제가 된다. 그만큼 충분한 준비와 충분한 기간, 의견 수렴을 통해서 신중하고 사려 깊게 규제가 개선되어야 한다.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채로 섣불리 변화시켰다가는 오히려 개선이 아닌 개악이 될 수도 있다.
필자는 이번 발표에서 언급된 몇 가지 개선 사항을 관련 부처에서 실행할 정도로 정말 준비가 되었는지, 또한 앞으로 어떠한 함정이 있을지를 몇 가지 짚어보려고 한다. 이번 발표 준비에도 관련 부처 실무자들이 필자의 블로그도 참고했다고 하니 (기자분께 들었다) 이러한 부분도 참고를 해주시면 좋겠다.
필자가 행사에서 발표한 자료 중 일부.
사실 대통령이 발표에 참석하실 수도 있다고 내심 기대했으나,
발표가 끝난 이후에야 도착하셨다.
‘선도입 후평가’, 정말 준비는 되었는가?
이번 발표에서 아직 우리가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선도입 후평가’ 부분이다. 사실은 이 ‘선도입 후평가’가 의료기기 인허가 (식약처 관할)에 관한 부분인지, 아니면 신의료기술평가와 수가 책정 (심평원 및 NECA)에 관한 부분인지는 불확실하다. 발표 원문을 보면 이 두 프로세스 중에 어디에 ‘선도입 후평가’ 기조를 도입할 것인지가 명확하게 나오지는 않는다. 원문에는 ‘신속하게 시장에 출시’를 강조하고 있으니, 이 두 프로세스 모두에 해당될 수 있다.
언론에서는 대부분 신의료기술평가 및 수가 책정 부분에 ‘선도입 후평가’가 도입될 것으로 전망하는 것 같다. ‘국내 임상 문헌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출시를 허가받지 못한 사례’ 등이 언급되는 것은 모두 신의료기술평가 관련 이야기이며, ‘사람 몸에 사용하지 않고 의사 진료 편의를 위한 기기는 식약처의 허가만 받으면 될 수 있도록 절차를 대폭 줄이겠습니다.’ 는 부분에서 식약처 인허가 자체에 대한 변화는 언급되지 않는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선도입 후평가’는 결국 미국 FDA의 Pre-Cert를 벤치마킹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에서는 (심평원이 아닌 식약처가 하는) 의료기기 인허가 과정에 해당되는 부분에 이러한 기조를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선도입 후평가’를 어떠한 방식으로 실행할 것인지 구체적인 안은 아직 없다. 하지만 미국에서 Pre-Cert를 어떤 식으로 구현하는지를 살펴보면 배울 점들이 있을 것이다.
무엇을,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FDA가 ‘디지털 헬스 이노베이션 액션 플랜‘을 처음으로 발표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년 전인 2017년 7월이다. 여기에서 FDA는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의 의료기기를 기존의 방식으로 규제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언급하며, 의료기기 중에 구체적으로는 소프트웨어 의료기기, 즉 SaMD(Software as a Medical Device)를 새로운 방식으로 규제하겠다고 발표했다. 필자가 여러번 강조했듯이, Pre-Cert는 개별 제품(product) 대상의 규제가 아니라, 제품을 개발하는 제조사(developer)에게 자격요건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근본적인 규제 프레임워크가 변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규제 프레임워크가 근본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은 상당히 세심한 준비가 필요하다. FDA는 2017년 발표 이후, 파일럿으로 삼성, 애플, 버릴리(구글), 머크, J&J, 핏빗 등 9개 기업을 선정하여 업계의 의견을 반영하며 세부적인 안들을 구체화해나가고 있다. 올해 초 대규모 워크샵을 개최하였고, 이후 지난 4월과 6월에 세부 워킹 모델(Working Model)이 두 번에 걸쳐서 업데이트 되었다. 이는 올해 말에 이르러서야 완성될 예정이다. 즉, 내부 논의를 거쳐 외부에 발표한 이후부터, 1년 반에 걸친 개선과 의견 수렴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해당 워킹모델을 보면, 규제할 의료기기를 IMDRF의 기준에 따라서 구분하고, 이렇게 구분된 의료기기를 ‘누가 만드는지’, 그리고 신규 기기인지인지, 큰 변화(major change), 작은 변화(minor change)가 있는지 등에 따라서 세부적인 규제 안을 만들어가고 있다. 또한 사후 규제를 어떠한 방식으로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계속 구체화시켜가고 있다.
지난 6월 발표된 Pre-Cert의 Working Model (v0.2)의 일부
이 Pre-Cert와 이번 문재인 대통령의 발표에 나온 ‘선도입 후평가’의 차이점은 분명히 있다. Pre-Cert는 SaMD의 ‘인허가’에 대해서 적용되며, 이번 ‘선도입 후평가’는 체외진단기기(IVD)의 신의료기술평가에 적용된다. 이는 큰 차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바는 이것이다. ‘선도입 후평가’라는 규제 방식의 근본적인 변화는 충분한 준비를 기반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FDA도 1년 반에 걸친 ‘공개적인’ 개선 절차, 의견 수렴을 거치면서 이 과정을 수행하고 있다. 중간중간 의견을 수렴한 워킹 모델도 계속 발표되고 있다. FDA가 먼저 시작했지만, 아직 끝나지는 않았으며, 올해 말에 결정될 것이라고 하지만 더 오래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과연 이러한 과정을 제대로 거치고 있는지에 대해서 우려가 든다.
후평가는 ‘누가’ 할 것인가
‘선도입 후평가’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부분은 이것을 과연 누가 할 것인가의 문제다. 사실 이는 ‘선도입 후평가’에 그치지 않고 규제 개혁 전반에 걸쳐서 현재 누락된 부분이다. 바로, 실무선에서 규제 전문가가 양적으로, 질적으로 모두 부족하다는 것이다. ‘선도입 후평가’의 규제 개선은 더 높은 전문성과 더 많은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방향의 변화다. 즉, 양적으로 더 많은 규제 전문가가 필요하며, 새로운 분야와 규제 방식에 맞는 새로운 역량을 가진 전문성의 ‘질적’ 향상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FDA는 Pre-Cert 로 규제를 전환하면서, 이 새로운 규제를 실행할 전문성을 질적으로, 양적으로 확장했다. 이를 전담하는 새로운 부서인 디지털 헬스케어 유닛을 창설하고, 전문가를 더 확충하고, 예산을 확보했다. 풀타음으로 뽑지 못하는 전문가는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이 하듯이, EIR (Entrepreneur In Residence)라는 파격적인 프로그램을 활용하기도 했다.
현재 식약처에서 디지털 헬스케어 부분을 몇 명이 맡고 있는지를 알면 아마 깜짝 놀랄 것이다. 작년부터 필자가 식약처의 인공지능 의료기기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전문가 협의체에 참여하면서 느낀 부분이기도 하다. 식약처 의료기기심사부 첨단의료기기과에서 인공지능 의료기기를 담당한 실무자는 2명 정도였다. 다른 디지털 헬스케어 관련 분야도 이분들이 대부분 담당하고 있다. 식약처에서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인력과 역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면 규제 개선을 제대로 실행할 수 없다.
실제로 식약처 담당자들은 격무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나마 과거 ‘하드웨어’ 의료기기를 전공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현재의 인력으로 새로운 규제를 실행할 여력이 있을까? 필자가 심평원은 잘 모르지만,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심평원이 일하는 방식은 워낙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그것 자체가 심평원이 비판받는 요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FDA는 새로운 규제 방식을 전환하기 위해서, 전담 부서를 만들고, 전문성을 질적/양적으로 보강하고, 예산을 확충했다. 이것 없이 변화를 제대로 구현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한국에서 이러한 소식은 전혀 들리지 않는다.
문재인 케어와의 충돌
자. 또 다른 근본적인 문제다. 바로 이번 규제 개선 발표가 문재인 정부의 핵심적인 의료 정책인 보장성 강화, 소위 ‘문재인 케어’의 방향성과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점이다.
이번 발표에서 대통령은 “첨단 의료기기가 신속하게 시장에 출시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언급했다. 새로운 기술이 의료 현장에 조속히 투입되기 위해서 기존에 큰 도움을 주던 제도가 바로 (인정)비급여이다. 비급여 항목은 남용되면서 여러 부작용을 낳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비급여를 통해서 새로운 기술의 개발과 시장 진출을 앞당김으로써 환자에게도 효용을 제공한 측면이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세계 최초이기 때문에) 근거가 아직 불충분하거나 아직은 비용 효과성이 충분하지 않아서 (즉, 가격이 비싸서) 국민건강보험의 급여로 커버해주기 어려운 의료기기가 기존에는 비급여로 의료진의 판단하에 제공되면서 추가적인 근거도 쌓고, 기술도 더 발전시킬 여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비급여를 없애겠다는 것이 문재인 케어의 핵심이 아니던가. ‘의학적으로 필요한 모든 행위’를 급여화함으로써 보장성을 강화하겠다는 것이 문재인 케어의 핵심이다. 즉, 첨단 의료기기, 의료 기술이 개발되었을 경우에 이것이 정말 의학적으로 필요한 것인지, 그 가치는 얼마인지를 정부가 판단하고, 예비 급여를 통한 환자 본인 부담 비율까지 책정하여, 결국 급여 체계로 편입시키는 것이 문재인 케어다.
평가해야 하는 항목이 많을수록 당연히 기술의 시장 진출은 늦어질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만약 정부가 첨단 의료기술을 ‘의학적으로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한다면 문재인케어 하에서는 급여 체계로 편입되지 못하고, 비급여로 서비스할 수도 없으므로 한국에서는 사업화가 불가능해진다.
필자는 항상 강조하듯이 ‘혁신의 필요성과 가치를 정부가 평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를 차치하고서라도 이번 발표와 문재인 케어의 방향성의 서로 상반된 방향성을 어떻게 해결할지가 큰 관건이 될 것이다.
- 시나리오1. 첨단의료기기는 보장성 강화의 예외로 두고, 비급여를 계속 인정한다.
- 시나리오2. 문재인 케어로 편입시키되, 그 평가 과정을 간소화 한다.
- 시나리오3. 첨단의료기기는 일단 시장에 출시하여 일정 기간 사용해본 후에 (의학적 필요성에 기반하여) 문재인 케어로 편입 여부 및 급여 수준, 환자 본인 부담 수준을 사후에 책정한다 (선도입 후평가)
이외에도 더 다양한 시나리오가 있을 수 있다. 사실 이번 발표에는 “첨단 의료기기에 대해서는 별도의 평가절차를 만들어 혁신성이 인정되면 즉시 시장에 출시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라는 부분이 언급되었다. ‘별도의 평가절차’와 앞서 언급한 ‘선도입 후평가’를 고려해본다면 현재로서는 시나리오 3이 가장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사람 몸에 사용하지 않고 의사 진료 편의를 위한 기기는 식약처의 허가만 받으면 될 수 있도록 절차를 대폭 줄이겠습니다.”라는 부분은 시나리오 1번에 해당하는 부분인지, 혹은 역시 시나리오 3에 해당하여 결국 수가화된다는 이야기일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부분은 앞으로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어떤 식으로든 첨단의료기기는 문재인 케어에서 예외 혹은 그에 준하는 별도 트렉을 만든다고 한다면, 그 예외에 포함되기 위한 기준은 어떻게 합리적으로 만들 것인가가 역시 문제가 된다. 기업으로서는 이 기준에 포함되는지 되지 않는지에 생사가 걸릴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특혜, 혹은 역차별의 이슈가 발생할 수도 있다.
문제는 적정 수가야, 바보야!
그렇다. 결국에는 수가다. 너무도 많이 제기된 문제라서, 고루하게 여겨질 수도 있고, ‘또 수가 이야기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에는 수가가 문제다. 그것도 ‘적정’ 수가의 문제.
의료기기를 개발하는 입장에서는 수가를 받아도 문제, 받지 않아도 문제다. 사실 문재인 케어로 가면 문제가 더욱 간단(?)해진다. 즉, 문재인 케어로 편입되어 수가를 받지 못하면 (비급여 서비스가 사라지므로) 국내에서는 아예 사업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말로 적정한 수가를 받을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앞서 첨단의료기술이 별도의 트렉을 통해 ‘선도입 후평가’의 과정을 거친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후평가’의 과정을 거쳐서 그 기술의 ‘의학적 필요성’ 및 ‘기술의 가치’를 평가받게 된다. 이에 따라서 결국 보험 급여 여부와 급여 수준, 환자 본인 부담 수준이 정해진다.
만약에 여기에서 정부가 혁신적 의료 기술의 필요성, 가치, 급여 수준, 환자 부담 수준을 모두 적정하게 평가할 수 있다면 문제는 해결된다. 하지만 과연 관계 부처에서 이렇게 할 수 있을 역량과 동기,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해서 현장의 실무자들은 매우 회의적이다. 이는 학습된 회의론이다. 지금까지 다국적 제약사의 약가를 선진국 대비 너무 후려쳐서 국내에서는 시장 철수하게 만든다거나, 의사들의 의료 행위에 대한 수가가 적정하지 않거나, 급여 삭감 기준이 일관적이거나 투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현재 의료계가 문재인케어를 결사반대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부가 적정 수가를 보장해줄 것이라고 기대하기가 (그동안의 경험으로 보아) 어렵기 때문이다.
혁신적 의료기기 규제에 대해서도, 만약 잘못되면 첨단 의료기술이 ‘시장에 빠르게 출시되고’, ‘문재인 케어로 빠르게 편입’ 되었지만, 정작 그 기술을 만든 기업은 한국에서 망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기술의 가치에 따른 급여와 환자 부담금이 적정하게 책정되지 않으면, (급여 수준이 원가 이하라서) 기업이 팔수록 손해를 보거나, 환자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도 본인 부담금이 너무 커서 (이 역시 국가가 정하므로) 결국 서비스를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규제 개선은 성공했지만, 기업은 망했다’의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앞서 언급한 이슈들도 적정 수가와 연계된다. ‘선도입 후평가’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 세심한 규제 변화와 전문 역량의 확충이 필요한 것도, 문재인 케어로 이 기술이 어떻게 편입될지의 별도 트렉이나 기준을 정하는 것도, 결국에는 이 수가를 적정하게 책정하기 위한 준비로 볼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준비들은 적정 수가를 위한 필요 조건이지 충분 조건은 결코 아니다. 이런 부분에서 필자를 비롯한 많은 전문가들은 이번 문재인 대통령의 발표를 환영하는 한편으로, 또 우려도 표명하고 있다.
문제는 실행이며, 악마는 디테일에
지금까지 이번 문재인 대통령의 의료기기 규제 개선 발표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사실 필자는 이번 발표에서 문재인케어, 의료전달체계, 적정 수가, 디지털 헬스케어 등이 더 직접적으로 언급되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의료기기, 특히 그 중에서도 체외진단기기에 국한되었기 때문에, 논의를 너무 넓히기도 힘들었을 것이라는 점도 이해한다. 중요한 것은 (대통령도 언급하였듯이) 이번 규제 개선이 다른 추가적인 규제 개선에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대통령은 의료기기 산업에서 규제 개선이 시작되면, ‘다른 산업’에서의 규제 혁신도 활기를 띨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굳이 다른 분야까지 갈 것도 없이, 사실 의료계 내부에서도 개선되어야 할 규제는 너무도 많고, 과제들은 산적해있다.
문제는 실행이며,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필자는 이번 글에서 규제 개선에 충분한 고민, 기간, 의견 수렴 과정이 필요로하며, 새로운 규제를 실행할 수 있는 전문성과 예산, 부처,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현 정부가 진행하는 의료 정책의 핵심인 문재인 케어에 이번 규제 개선 안이 충돌하지 않고 어떻게 녹아들 수 있을지, 특히 수가를 어떻게 적정하게 책정할 수 있을지가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필자는 이번 규제 개선 안을 환영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일 뿐이고, 디테일은 지금부터 채워나가야 한다. 이번에는 업계의 회의론과 불신을 잠재워줄 수 있도록 계속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행되기를 기대해본다. 필자도 계속 목소리를 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