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칼럼은 제가 매일경제신문에 기고한 것입니다. 원문은 여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디지털 헬스케어에 대한 미국 FDA의 규제 혁신이 계속되고 있다. FDA의 이러한 파격적인 변화는 폭발적으로 발전하는 디지털 헬스케어 혁신을 기존의 방식으로 규제하는 것이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FDA 스스로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전통적인 의료기기 규제는 하드웨어를 대상으로 하였지만, 최근에는 인공지능,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클라우드 컴퓨팅, 블록체인 등 의료기기의 범주가 새롭게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의사이면서, 의료계 및 산업계 경험이 풍부한 스콧 고틀립(Scott Gottlieb)이 국장으로 새롭게 부임한 이후 FDA의 규제 혁신에 더욱 박차가 가해지고 있다. 스콧 코틀립 국장은 최근 “FDA의 전통적인 의료기기 심사 기준은 새로운 종류의 의료기기 심사에 적합하지 않다” 면서, “우리는 규제의 개선을 통해서 혁신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혁신을 장려해야 한다”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지난 7월 말 FDA는 소프트웨어 의료기기를 개별 제품이 아니라, 제조사 기반의 규제로 전환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엄격한 조건을 갖춘 기업에 자격을 미리 부여하면, 이 기업은 별도의 인허가 과정 없이, 혹은 매우 간소화된 과정을 거쳐서 시장에 출시할 수 있게 된다. 즉, 과거에는 의료기기를 개발한 후, 임상시험을 거쳐서 인허가를 받은 다음에야 출시할 수 있었지만, 이 사전 인증을 받은 기업은 개발 직후 바로 시장에 출시할 수 있다.
이러한 제조사에게 ‘프리 패스’를 주는 정책은 개별 기업의 자율성을 크게 높이고, 디지털 헬스케어 기술 혁신에 대한 동인을 효과적으로 높일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이러한 사전 인증을 어떠한 기준으로 얼마나 엄격하게 부여할지가 이 제도의 성패를 결정할 것이다. FDA는 이 사전 인증 프로그램의 파일럿에 참여할 기업을 모집한 결과, 지난 9월 100 여개의 지원 기업 중에 9개의 참여 기업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구글, 애플, 삼성 등 IT 기업, 존슨 앤 존슨, 로슈 등 제약사뿐만 아니라, 핏비트 등의 디지털 헬스케어 스타트업도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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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가 FDA는 유전자 테스트에도 이런 제조사 기반의 규제를 적용하겠다는 계획을 최근 밝혔다. 특히, 이는 질병 위험도 유전자 검사(Genetic Health Risk)를 병원을 거치지 않고 환자에게 직접 제공(Direct-to-Consumer)하는 서비스에 관한 것이다. FDA는 2013년 말 23앤드미의 이러한 서비스를 전면 금지하면서 미국에서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으며, 최근까지도 일부 항목을 제외한 대부분은 아직 미국에서도 불법이다.
23andMe는 2013년 당시 수십 개 이상의 질병 위험도 유전자 검사를 환자에게 직접(DTC) 제공해오다가, 2013년 11월 돌연 FDA로부터 판매 금지 신청을 받았다. 이후에도 DTC를 고집한 23andMe는 블룸 증후군 등 유전 질병에 대한 보인자 분석 (2015년 2월) 및 파킨슨과 알츠하이머 등 10개 질병 (2017년 4월)에 대한 임상 검증 및 인허가 획득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예전의 서비스를 되찾아 가는 과정에 있다. 기존 규제 시스템 하에서 새로운 서비스를 개척해나가는 퍼스트 무버로서 23andMe는 규제까지 개척해온 것이다.
하지만 최근 FDA 스콧 고틀립 국장은 ‘이러한 과정에서 FDA도 많은 교훈을 얻었다’고 언급하며, 이러한 유전자 검사의 인허가 역시 제조사를 기반으로 극히 간소화하는 방안을 내어 놓았다. 23앤드미와 같은 기업이 질병 위험도 검사를 정해진 기준에 대해서 ‘한 번’만 인허가받으면, 그 이후로는 같은 종류의 검사를 더 이상 추가적인 인허가 과정 없이 시장에 출시할 수 있다. 이 정책은 현재 고틀립 국장이 제안한 안건(a notice of intent) 정도의 형태이지만, 만약 통과되면 23앤드미 등이 제공하던 100가지가 넘는 질병 위험도 검사가 즉시 재개될 전망이다. 그 결과 유전자 분석 서비스에 대한 국내 규제와의 괴리는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한국은 현재 12개 항목을 제외한 환자 직접 유전자 검사는 모두 불법이며, 검사 가능한 유전자 목록까지도 정부가 정해놓았다.
이러한 FDA의 개혁은 의료 혁신을 장려하고 규제하는 방향성에 대해서 문재인 케어로 대표되는 현 정부의 의료 정책 기조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문재인 케어는 FDA의 새로운 규제 방식과는 완전히 반대 방향이기 때문이다. FDA의 변화는 의료 혁신이 예측 불가하며, 정부가 이를 평가하거나 규제하는 것이 합리적이지도, 가능하지도 않다는 인식에 근거한다. 혁신은 어디에서 무엇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혁신이며, 혁신의 향후 적용 범위, 방식, 가치를 국가에서 산정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의학적으로 필요한 모든 의료 서비스를 급여화’하겠다는 문재인 케어는 정부가 의료 혁신의 가치와 필요성을 정부가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기존의 비급여 의료 행위를 전면 급여화할 수 있을지도 문제이지만, 이와는 별개로 완전히 새롭게 도출되는 혁신적인 의료 기술이 문재인 케어 하에서 어떻게 관리될 것인지도 반드시 논의되어야 한다.
외국의 기업이 혁신을 폭발적으로 쏟아내면서 환자를 더 효과적으로 진료하고 치료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오늘날, 국내 기업의 저변은 포지티브 규제 하에서 자꾸만 좁아지고 있다. 여기에 더해 문재인 케어는 기업의 자율성을 떨어뜨리고, 의료 기술 혁신의 동인을 더욱 저해한다. 이렇게 국내 의료 산업이 고사되면, 궁극적으로 그 피해자는 결국 환자가 될 것이다.
한 나라의 의료 산업의 수준은 결국 의료 규제의 수준에 의해서 결정된다. 의료 규제가 비합리적이고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면, 우수한 기술이 개발되기도 어렵고, 그 결과물에 환자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도 없다. 한국의 의료 산업은 이미 위기에 처해 있다. 문재인 케어 하에서도 의료 혁신 및 기술 발전을 저해하지 않기 위한 방안이 마련되기를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