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기술의 발전이 의학에 미치는 가장 큰 변화 중의 하나는 의료 분야에서도 전문지식의 비대칭성이 줄어들고 환자들의 참여와 권한을 강화시킨다는 것입니다. 환자들은 이미 스스로 의료 데이터를 만들어내고 서로 공유하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미래 의료의 지향점을 잘 나타내는 소위 4P 의료 (4P Medicine) 의 한 요소도 환자의 참여 (Participatory)에 관한 것이지요.
더 나아가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환자들은 이제 더 이상 의료 서비스를 받기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때로는 의료기기에 대한 느린 임상 연구와 규제 프로세스를 무작정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의료 기기를 만들고 전파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공췌장의 희망고문
당뇨병 환자들은 인슐린을 만들어내지 못하거나, 조절이 되지 않기 때문에 적정 수준의 혈당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혈당이 너무 낮거나, 높은 경우 합병증이나 목숨이 위험하므로 하루에도 여러번 혈당을 측정하고 그에 맞는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이런 당뇨병 환자들에게 인공췌장(artificial pancreas system)은 큰 희망 중의 하나입니다. 인공지능을 통한 ‘자율주행차’ 처럼 인공췌장은 혈당을 지속적으로 측정하면서, 이에 맞게 필요한만큼 (혹은 예측을 통해서도) 자동으로 인슐린을 주입해주는 일종의 closed loop system 입니다.
일반적으로 인공췌장은 연속혈당계(CGM)-인슐린 펌프-알고리즘의 조합으로 이뤄집니다. 만약 인공췌장이 안전하고 정확하게 동작한다면 당뇨병 환자들의 혈당의 안정적인 관리도 꿈은 아닐 것입니다.
인공췌장 시스템의 구성요소 (출처)
하지만 아직 인공췌장은 상용화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2004년 정도부터 인공췌장에 관한 수십편의 임상 논문들이 나왔으며, 최근에는 대규모 임상시험에서도 혈당 관리에 대한 성공적인 결과들이 나오고 있습니다만, 아직까지 최종 허가승인이 나지는 않았습니다. 당뇨병 환자들은 ‘이제 조만간 인공췌장에 관한 임상 시험이 끝나고 허가가 날 것이다’ 는 희망고문을 몇 년째 받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환자들이 직접 만든 DIY 인공췌장
최근 미국에서는 참다 못한 DIY로 환자들이 인공췌장을 스스로 만들어서 사용하는 사례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인공췌장의 구성 요소인 연속혈당계, 인슐린 펌프는 각각 기존에 활용되고 있기 때문에, 이를 간단한 하드웨어와 직접 개발한 알고리즘을 통해서 인공췌장을 만드는 것입니다.
OpenAPS 라고 불리는 비영리단체는 초소형 PC 라즈베리 파이 (Raspberry Pi) 를 이용해서 연속혈당계, 인슐린 펌프, 배터리 등을 연결하고, 혈당에 따라 인슐린을 자동으로 주입할 수 있는 간단한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오픈소스로 DIY 인공 췌장을 만드는 법을 배포하고 있습니다.
당뇨병 환자들이면 누구든 인터넷에서 이 DIY 인공 췌장을 만드는 법을 배울 수 있으며, 이 기기를 더 개선시킬 수도 있습니다. 환자들이 직접 자발적으로 만드는 이 closed loop system 은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당뇨병 환자들의 열렬한 성원을 받고 있습니다.
연속혈당계, 인슐린펌프, 배터리 등을 연결해서 만든 OpenAPS 시스템 (출처: Medscape)
특히 기사에 나오듯이 인공췌장을 통해서, 제 1형 당뇨병 환자들의 가장 큰 고민이기도 한 야간 저혈당증 문제를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었다는 환자들의 경험담이 있기도 했습니다.
야간 저혈당은 당뇨병에서 가장 무섭고 우울한 부분이다. 밤중에 땀에 젖은채 떨면서 깨어나서, 그것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 말이다. OpenAPS를 사용한 뒤로 더 이상 이런 경험을 하지 않아도 된다. “always the most scary and depressing part of diabetes… waking up in sweat, shaking, and lying still until it’s over. It doesn’t happen anymore [with OpenAPS].”
물론 이 시스템이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몇가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식전, 식후 혈당 측정을 여전히 해야 합니다만, 환자들은 야간 저혈당증 예방이나, 식전 몇시간 동안만이라도 OpenAPS를 통해 혈당을 관리할 수 있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 OpenAPS 시스템은 FDA 승인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환자들이 자발적으로 개발하고 오픈소스로 배포하며 스스로에게 사용하기 때문에 이를 규제할 방법도 없고, 규제할 수도 없습니다. 이는 환자들이 “우리는 그냥 마냥 기다리지만은 않겠다” 고 주창하는 #WeAreNotWaiting 운동의 일환입니다.
We Are Not Waiting
예전에 제가 블로그에 소개해드린 Nightscout 역시 #WeAreNotWaiting 운동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역시 당뇨병 환자들이 자발적으로 의료 시스템을 개발하고 배포한 사례입니다. 기존 덱스콤 등의 역속혈당계의 데이터를 ‘근처에 있는’ 전용 기기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즉, 소아 당뇨병 환자들이 연속혈당계를 착용하고 있더라도 부모가 회사에 있는 등 가까이 있지 않을 때에는 자녀의 혈당 수치를 알 수 없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로 당뇨병에 걸린 자녀를 둔) 일반인 개발자들이 덱스콤 연속혈당계 기기를 해킹하고, 여기에 안드로이드 폰을 연결해서 데이터를 클라우드에 올릴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이로써 부모들은 자녀의 혈당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웹브라우저, 스마트폰, 심지어는 페블 스마트워치에도 언제 어디서든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NightScout 의 DIY 혈당 수치 모니터의 구조도 (출처: WSJ)
이 코드와 제작법 역시 오픈소스로 공개되었고, SNS 등을 통해 전파되면서 당뇨병 환자 커뮤니티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역시 FDA는 규제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환자들의 적극적인 움직임에 결국 FDA 와 덱스콤도 변화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FDA는 의료기기 액세서리 가이드라인 개정을 통해서 혈당을 스마트폰 등으로 단순 디스플레이 하는 앱의 규제를 완화시켜 주었고, 이에 따라 덱스콤은 원격으로 스마트폰, 애플워치 등으로 데이터를 모니터링할 수 있는 서비스를 빠르게 시장에 내어놓을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환자들의 참여와 권한 강화
이 OpenAPS 프로젝트를 통해서 환자들이 직접 만든 DIY 인공췌장은 최근 오바마 대통령이 Precision Medicine Initiative 의 행사에 관계자들을 초대하고 이에 관해 언급함으로써 더 유명해지게 되었습니다. Precision Medicine Initiative 는 주로 암, 신약개발, 유전정보 분석과 관련한 일을 하고 있지만, 정밀 의료는 유전정보 뿐만이 아니라 웨어러블 등의 기기로 만들어내는 개별 환자들의 헬스케어 데이터도 이용하게 됩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 행사에 아래와 같이 정밀 의료 패러다임 하에서 환자들의 참여와 권한이 강화됨을 직접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정밀의료의 전망 중 하나는 연구자와 의사들에게만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방편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개인 환자들에게 자신을 모니터링하고 건강을 관리할 수 있는 적극적인 권한을 부여한다 (“One of the promises of Precision Medicine is not just giving researchers and medical practitioners tools to help cure people, it’s about empowering individuals to monitor and take a more active role in their health.”) “
이러한 흐름에 OpenAPS는 대표적인 사례이며, 실제로 이 행사에 OpenAPS 를 처음 시작한 장본인이자 본인이 14살 때부터 제 1형 당뇨병 환자인 다나 루이스 (Dana Lewis)를 초청하기도 했습니다.
향후 환자들의 권한은 더욱 강해질 것이며 이렇게 ‘더 이상 기다리지 않는’ 환자들은 더 늘어날 것입니다. 과거 NightScout 가 덱스콤의 연속 혈당계와 FDA의 변화까지 이끌어내었듯이, OpenAPS 의 활동이 몇년 째 ‘이제 거의 다 구현되어 가는’ 인공췌장의 현실화를 더욱 앞당길 수 있을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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