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는 현재 변혁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과거를 돌아보더라도 의료와 헬스케어만큼 빠르게 발전하며 새로운 기술이 적극적으로 적용되는 분야도 드물었다. 질병을 치료함으로써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분야인만큼 많은 투자와 연구가 투입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의료는 지금까지도 지속적인 변화를 거치며 진화해왔다.
하지만 지금 의료가 거치는 변혁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띄고 있다. 변혁의 규모와 속도의 측면뿐만 아니라, 그러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도 다르다. 또한 그러한 변화가 의료와 우리의 삶에 미칠 파급 효과도 보다 근본적이다. 과거의 의료 혁신은 의학 내부나, 약학, 생화학, 생명공학 등 전통적인 의학 주변부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지금 의료가 겪고 있는 파괴적인 변혁은 의학과는 완전히 별개로 간주되던 시스템 외부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 변혁의 진원지는 바로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다.
“디지털 의료는 어떻게 구현되는가” 시리즈 보기
- 변혁의 쓰나미 앞에서
- 누가 디지털 의료를 이끄는가
- 데이터, 데이터, 데이터!
- 4P 의료의 실현
- 스마트폰
- 이제 스마트폰이 당신을 진찰한다
- 웨어러블 디바이스
- 개인 유전 정보 분석의 모든 것!
- 환자 유래의 의료 데이터 (PGHD)
- 헬스케어 데이터의 통합
- 헬스케어 데이터 플랫폼: 애플 & 발리딕
- 빅 데이터 의료
- 원격 환자 모니터링
- 원격진료
- 인공지능
디지털 기술의 기하급수적 발전
디지털 기술은 기하급수적 (exponential)으로 발전한다. 무엇인가 빠르게 증가하거나 발전할 때, 우리는 그 속도를 강조하기 위해서 흔히 ‘기하급수적’이라는 표현을 관용어처럼 사용한다. 국어사전에 나오는 설명 중의 하나도 ‘증가하는 수나 양이 아주 많음을 이르는 말’이다. 엄밀히 설명하자면, 우리가 중고등학교 수학시간에 배운 등비수열에 따라 증가하는 것이 기하급수적인 증가이다. 즉, 이전 상태에 비해 매번 일정한 비율로 증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기하급수적인 증가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하기란 쉽지 않다. 인간의 사고는 선형적(linear)인 변화에 더 익숙하며, 기하급수적 변화에 비해 더 직관적으로 이해하기도 쉽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래에 닥칠 변화에 대해서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기하급수적 증가의 위력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았을 ‘체스판의 우화‘이다. 옛날 옛적에 왕국의 신하가 큰 공을 세웠다. (어떤 버전의 우화에서는 신하 대신, 체스 게임을 발명한 발명가라고 나오기도 한다) 이에 기뻐한 왕이 신하에게 상을 내리겠다며, 원하는 것을 이야기해보라고 한다. 이에 신하는 “체스판 첫 칸에 쌀알 한 톨로 시작해서, 그다음 칸으로 넘어갈 때마다 두 배씩만 늘려달라” 고 했다. 한 톨, 두 톨, 네 톨, 여덟 톨… 과 같이 쌀알이 적게 드는 것을 보고 대수롭지 생각한 왕은 이를 허락했다.
다음 칸으로 계속 넘어갈수록 쌀알이 조금씩 증가했지만, 중반부까지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체스판의 절반이 끝날 때까지 놓인 쌀알을 모두 합하면, 약 43억톨 정도가 된다. 이는 10만 킬로그램 정도로, 아주 큰 논이 있으면 충분히 달성할 수 있는 양이다. 이는 최근 인도의 연간 쌀 수확량의 백만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체스판의 우화
하지만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만약 체스판의 전체에 놓이는 쌀알을 모두 합하면 자그마치 총 18,446,744,073,709,551,615 개라는 어마어마한 양이 된다. 이는 최근 전 세계 연간 쌀 생산량의 약 천 배 정도가 되는 양이다. 이를 모두 땅에 깔아놓는다고 생각하면 바다를 포함한 지구 표면의 약 두 배에 해당하는 면적이 필요하다.
우화에서는 체스판의 절반을 넘어서자 조금씩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기 시작하던 왕은 자기가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에는 격노하여 그 신하의 목을 자르고 만다.
이것이 매번 일정한 배율로 증가하는 기하급수적인 증가(exponential growth)의 위력이다. 선형적 증가(linear growth)와 비교했을 때 기하급수적 증가는 초반에는 그 차이가 미미하다. 체스판의 초반부에 증가량이 미미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다가 ‘곡선의 무릎 (knee of curve)’이라는 특정 순간을 지나면서 그 차이가 급격히 벌어지기 시작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그 차이는 더욱 커지게 된다.
선형적 증가와 기하급수적 증가의 차이
문제는 디지털 기술이 체스판의 우화에서 쌀알이 증가했던 것과 같이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이 유명한 ‘무어의 법칙 (moose’s law)’이다. 인텔의 공동 설립자인 고든 무어가 1965년에 내어놓은 것으로, 반도체 집적회로의 성능이 24개월마다 2배씩 증가한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서 이 법칙이 약간씩 빗나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의견들이 있지만, 적어도 1970년대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집적회로의 성능의 발전을 상당히 정확하게 예측해오고 있다.
무어의 법칙에 따른 집적회로의 발전 (출처)
더 나아가 이러한 기하급수적인 발전은 단순히 집적회로의 성능뿐만 아니라, 다양한 디지털 기술에 폭넓게 적용되고 있다. 배가 (혹은 반감) 시간은 다르지만 기술의 수준이나 가격대 성능비가 대부분 1-3년 주기로 개선된다. 세계적인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 (Ray Kurzweil)의 명저, ‘특이점이 온다 (Singularity is Near)’ 에는 여러 디지털 기술의 배가 (또는 반감) 시간이 아래와 같이 정리되어 있다.
- DRAM ‘하프 피치’ 최소 칩 크기: 5.4년
- DRAM (달러 당 비트): 1.5년
- 평균 트랜지스터 가격: 1.6년
- 트랜지스터 처리 주기당 마이크로프로세서 비용: 1.1년
- 총 판매된 비트: 1.1년
- 처리 장치 성능 (MIPS): 1.8년
- 인텔 마이크로프로세서의 트랜지스터 개수: 2년
- 마이크로프로세서의 클럭 속도: 3년
미래학자들은 이제 우리가 디지털 기술의 측면에서 ‘체스판의 후반부‘에 접어들었다고 이야기한다. 지금까지도 기술이 빠르게 발전해왔지만, 앞으로 그 발전 속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가 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기하급수적으로 기술이 고도의 발전을 거듭하다 보면 인공지능 등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기술을 이해하거나 따라잡지 못하는 시점이 온다고도 예측한다. 이를 ‘특이점 (singularity)’이라고 하며, 앞서 언급한 미래학자이자 구글의 기술이사를 맡고 있는 레이 커즈와일이 대표적인 특이점 주의자이다. 특이점이라는 것이 존재할지, 언제 도달 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가장 과감한 주장을 펼치는 레이 커즈와일에 따르면 2045년 전후에 특이점에 도달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컴퓨터 연산능력이 기하급수적인 성장을 계속한다면 2030년 전후로는 한 사람의 지능을 컴퓨터가 넘어서게 되고, 2045년 정도에는 인류 전체의 지능을 컴퓨터가 능가하게 된다는 것이다.
레이 커즈와일은 2045년 경에 특이점이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출처: ‘특이점이 온다’)
변혁의 쓰나미 앞에서
이렇게 기하급수적인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급기야 의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전자 의무기록 (electronic medical record), 유전체 분석 등의 비교적 의료 시스템 내의 변화뿐만 아니라,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웨어러블 디바이스, 스마트폰, 클라우드 컴퓨팅, 3D 프린터 등 기존 의료 시스템 밖 디지털 기술이 의료 분야에 빠르고 광범위하게 접목되고 있다. 이로 인해 때로는 공상과학 영화 수준의 의료 기술까지도 구현되고도 있다.
디지털 기술과 의료의 경계는 점점 더 허물어지고 있으며, 갈수록 이 두 분야를 명확하게 구분 짓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첨단 디지털 기술의 대표적이고 최우선적인 활용 분야는 이미 의료 분야이며, 디지털 기술을 빼놓고는 미래의 의료를 설명하기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의학의 긴 역사를 통틀어서도 가장 근본적이고 파괴적일 수 있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료의 개념 자체를 뒤집어엎을 정도로 말이다. ‘의료의 개념 자체가 바뀐다’는 말이 지나치다고 생각될지도 모르겠지만, 약간만 시야를 넓혀보면 다른 분야에서는 이런 변화가 이미 폭넓게 일어나고 있다.
자율주행차의 보급으로 운전기사가 기계로 대체되며, 이에 따라 자동차 산업 및 운송 산업과 사회 구조까지 뒤바뀐다. 3D 프린터의 보급으로 전통적인 공장과 생산 직종이 사라지고 있다. 핀테크의 등장으로 금융업계에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드론의 보급으로 물류배송체계가 바뀐다. 우버는 전통적인 운송업계를 무너뜨렸으며, 에어비앤비는 기존 숙박업계를 와해시키고 있다. 아마존은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 소매 생태계를 무너뜨렸다. 코세라 (Coursera) 등 MOOC (Massive Open Online Course)의 활성화로 전통적인 대학의 역할이 축소된다. 유튜브 등을 통한 개인 미디어의 범람으로 기존 방송사와 언론사의 역할도 줄어든다.
전통적인 산업이 무너지고 기존의 직업은 없어진다. 기계가 인간을 대신한다. 소비자가 생산자가 되고, 승객이 기사가 되고, 숙박객이 숙박업자가 되며, 시청자가 제작자가 된다. 공장 없는 제조기업이 생기고, 교실 없는 대학이 생기며, 운전자가 없는 운송업체가 생긴다. 아래가 위가 되고, 위가 아래가 된다.
분야를 막론하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 결코 의료만 예외로 남아 있을 수는 없다. 미래에도 과연 의사라는 직업이 필요할 것이며 의사에게 요구되는 역할은 지금과 같을까. 진료실과 병원은 지금 같은 구조와 체계로 남아 있을까. 현재 누구나 굳건히 믿고 있는 진료, 진단, 처방 및 연구 등의 개념은 10년, 20년 뒤에도 여전히 유효할까. 의사와 환자의 역할과 관계는 어떠할까.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사실 의료는 이러한 변화의 예외는커녕 오히려 정면으로 직격탄을 맞고 있는 대표적인 분야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미래에 맞이하게 될 의료의 모습은 지금과는 크게 다를 것이라는 점이다. 기술의 진화 속도를 고려해본다면 현재의 시점에서 아무리 과감하게 미래의 의료상을 예측한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그러한 예견조차도 너무 보수적이었음을 깨닫게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현재 우리가 의료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흥분되는 변곡점을 지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이러한 변화가 달갑게 느껴질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변화를 환영하고 그 과정에서 파생되는 기회를 잡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이러한 변화를 지독한 불운으로 간주하고 부인하거나 끝가지 저항하려고 할 것이다.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이러한 변화는 이미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쓰나미와 같은 거대한 변화는 결코 거스르거나 피할 수 없는 도도한 흐름이다. 이러한 대전제를 받아들이고 변화하지 않는다면 결국 남은 것은 도태와 멸종 밖에 없다. 산업화시대의 공장에 기계가 도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일부 블루 칼라 노동자들이 벌였던 기계 파괴 운동(러다이트 운동)의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당신이 이 변화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이제는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대비를 시작해야 할 때이다.
디지털 의료의 지향점
디지털 기술 혁신이 의료 기술과 융합되어 변화되고 새롭게 태동되는 의료 분야를 나는 ‘디지털 의료 (digital medicine)’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는 다양한 디지털 기술이 의료 분야에 영향을 미치는 무척이나 넓은 범주를 총칭하기 때문에 다소 모호한 개념처럼 들릴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는 아직 이 표현 자체가 거의 쓰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스크립스 중개과학연구소 (Scripps Translational Science Institute)는 동명의 학과를 만드는 등 세계적인 의료 혁신의 선구자들은 이미 널리 사용하고 있는 용어이다. 디지털 의료라는 분야가 미래에 의료가 가지게 될 모습을 전부 대변하지는 못하겠지만, 그중의 상당 부분을 포괄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디지털 의료라는 용어가 생소하다고 해서 이 분야가 추구하는 바도 생소한 것은 아니다. 아니, 반대로 의료가 추구하는 미래의 궁극적인 이상향이 바로 이 디지털 의료의 구현으로 달성될 수 있다.
의료계 종사자라면 소위 ‘4P 의학 (4P medicine)’이라는 용어에 익숙할 것이다. 시스템 생물학의 선구자인 리로이 후드 (Leroy Hood) 등이 2000년대 중반에 처음 소개한 것으로 보이는 이 개념은 P로 시작하는 4가지 의료 혁신의 목표 즉, 예측 의료 (Predictive Medicine), 맞춤 의료 (Personalized Medicine), 예방 의료 (Preventive Medicine), 참여 의료 (Participatory Medicine)를 의미한다. 질병을 미리 예측하고, 사전에 예방하며, 개별 환자에 특화된 맞춤형 의료를 제공하고, 그 과정에서 환자의 역할이 커진다는 것이다.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이 용어는 ‘빅 데이터’와 같이 일종의 유행어(buzz word)처럼 그동안 너무 남발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뻔하거나 진부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의료계 종사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과제 제안서에 4P 의료를 구현하겠다는 내용을 써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도 그중의 한 명이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조금 달라졌다. 단순히 막연한 구호에 그치던 4P 의료를 실질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이 생겼기 때문이다. 4P 의료가 우리가 언젠가는 당도하려고 하는 목적지라면, 이제 그곳에 이르기 위한 꽤나 구체적인 지도와 이동 수단까지 갖추게 되었다. 디지털 의료가 그중의 하나이다. 사실 많은 선구자들은 이미 저마다 그 여정에 오르고 있으며,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는 곳도 많다.
디지털 의료의 궁극적인 목적이 4P 의료를 구현하는 것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하지만 디지털 의료를 구현하면 결과적으로 4P 의료의 많은 부분도 충족시킬 수 있다. 디지털 의료의 어떤 측면이 4P 의료 중 어느 부분을 어떻게 실현하는지에 대해서는 차근차근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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