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29th November 2024,
최윤섭의 디지털 헬스케어

인공지능의 시대, 의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이제는 인공지능에 의한 의사의 역할 변화 중, 앞으로도 유지되고 더 강조될 역할,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새로운 역할에 대해서도 알아볼 차례다. 최근의 의료 인공지능 관련 논의에서는 의사의 ‘사라질 역할’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유지될 역할과 새롭게 생겨날 역할에 대한 고민은 부족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의사가 인공지능이 도입된 미래를 살아가고 발 빠르게 진화하기 위해서는 이 부분에 대한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의학적 최종 의사 결정권자

인공지능의 도입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인간 의사의 역할은 바로 최종 의사 결정권자의 역할이다. 현재의 의료와 규제 패러다임 하에서는 의료 행위에서 의사의 판단과 의사결정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성능이 우수한 인공지능이라고 할지라도 오류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인공지능이 최종적인 의사결정까지 내리게 만드는 것은 기술적으로나, 윤리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을뿐더러, 환자나 의사 모두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예외적이거나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인공지능의 판단을 참고하여 최종적인 의료적 의사 결정을 내리는 주체는 바로 인간 의사가 될 것으로 본다. 예외적인 경우라면, 예를 들어 당뇨 환자의 혈당 변화에 따라 인슐린 용량을 ‘실시간으로’ 자동 조절하는 인공췌장 기기의 경우에는 매번 의사의 판단이 개입되기는 어렵다. 하지만 앞서 우리가 살펴본 IBM 왓슨 포 온콜로지나 딥러닝 영상 분석, 패혈증이나 부정맥 예측 등 많은 경우에는 인공지능이 도출한 결과를 최종적으로 의사가 판단하는 과정을 거칠 것이다.

2017년 12월에 발표된 FDA의 의료 인공지능 의료기기 가이드라인에도 인공지능의 판단 과정과 결론에 대해서 의사가 독립적으로 검토(review)할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구분하고 있다. 특히, 의사가 독립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해주며, 그 결과의 근거를 의사가 평가할 수 있는 경우라면 해당 인공지능은 의료기기 인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반대로 의사의 독립적인 판단을 보장하지 않는 경우에는 엄격한 임상시험과 인허가 과정을 거쳐서 의료기기 인허가를 받아야만 한다.

여기에서 참고할 것은 최근 의료에서는 의사 결정에 환자를 참여시키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1, 2]. 대부분의 의학적 상황에서는 한 가지 이상의 합리적인 치료 방식이 존재하게 되며, 다른 치료 방식은 다른 효과 및 부작용, 비용을 수반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 진단이나 치료법을 결정하는 과정에 환자 본인의 가치관과 의향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를 ‘공유된 의사결정(shared decision making)’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내 몸의 결정에 나도 참여한다’는 환자의 권리도 증진될 뿐만 아니라, 연구에 따르면 치료에 임하는 자세와 치료 결과까지도 개선된다 [ref].

다만 이러한 경우에도 환자를 의사 결정에 참여시키고, 정보와 치료 옵션을 제공하는 등의 과정을 이끄는 주체는 의사가 될 것이다. 또한, 환자가 원한다고 할지라도 의학적으로 불가하거나 의사의 판단에 반하는 결정을 내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의사가 의학적 최종 의사 결정 과정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부분 때문에 의료 인공지능이 의사 결정 과정에 도입된다고 할지라도,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의사에게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의 결론을 받아들일지, 어떻게 활용할지, 환자에게 적용할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주체가 바로 의사이기 때문이다. (의료 인공지능이 개입된 의료적 의사결정에서 의료 사고가 발생할 경우 책임의 소재가 누구에게 얼마나 있는지는 복잡한 이슈이므로, 아래에서 별도로 논의하도록 하겠다)

또한, 의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러한 최종적 의사 결정 권한과 책임을 결코 놓을 수 없고, 놓아서도 안 될 것이다. 이는 임상의로서 지킬 수 있는 마지막 보루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소셜 네트워크 등에서 공유된 의료 인공지능의 도입 기사에 대해 일부 의사들의 “이제 닥터 왓슨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테니, 의료 사고의 책임도 왓슨이 지시면 되겠네요”와 같은 조소 섞인 반응을 볼 때가 있다. 하지만 의사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의료 사고의 책임까지 인공지능이 지게 되는 상황을 맞이하는 것이 절대 바람직하지는 않다고 본다. 의사결정의 책임을 진다는 것은 그 의사결정의 권한까지도 가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자율주행차와 의사의 미래

인공지능이 도입되더라도 의사의 최종 의사 결정권이 앞으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상기와 같은 정도가 현재의 의료 패러다임 하에서 우리가 논리적으로 상정해볼 수 있는 범위로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도 몇 가지 더 고려해볼 점이 있다. 필자는 두 가지 정도를 언급하고 넘어가려고 한다. 하나는 자율주행차의 비유이며, 또 다른 하나는 바로 인공지능에 의한 의사의 탈숙련화(deskilling) 가능성이다.

먼저 자율 주행차의 비유를 보자. 자율 주행 기능의 상용화가 진행됨에 따라서 관련 법규나 원칙의 변화뿐만 아니라 교통 인프라의 변화에 대한 논의까지도 활발하다. 대표적인 이슈로는 도로교통법상 자율주행차를 법적으로 어떻게 정의할 것이냐, 자율주행차의 운전석에 사람이 반드시 착석해야 하는가, 자동차를 제어하는 인공지능인 자율주행시스템을 ‘운전자’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ref]. 또한, 자율주행차의 사고가 났을 경우 책임의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하는지, 자율주행차도 면허가 필요한지도 고려사항이다.

이미 이런 논의에 따라서 규제적으로도 예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근본적인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아닌 자율주행차를 ‘운전자’로 인정하는 부분이 그러하다. 자율주행시스템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사고 발생 시에 법적 책임을 부과할 수 없어서 법적 규율에 있어 공백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ref].

이에 2016년 2월 미국에서는 자율주행차 자체가 운전자가 된다는 개념을 인정한 바 있다. 미국 도로교통안전국(NHTSA)은 구글이 개발하고 있는 자율주행차가 연방법상 차량 안전 규정에 부합하는지 묻는 질의에 대한 답변서에서, “차에 타고 있는 사람이 운전하지 않았을 경우, 그 차를 움직이게 한 ‘그 무엇’을 ‘운전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는 자율주행 자동차의 경우 ‘차 자체’가 운전자가 된다는 개념을 도로교통안전국에서 인정한 것이다[1, 2].

또한, 사람이 운전하는 것보다 자율주행차가 운전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근거도 도출되고 있다. 미국 도로교통안전국은 테슬라의 2014년부터 2016년의 주행 데이터를 분석하여 오토파일럿 기능이 추가되기 전과 이후의 에어백 작동 빈도를 살펴보았다. 에어백의 작동이 큰 사고의 발생을 확인할 수 있는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오토파일럿 기능 탑재 이후의 사고 발생률이 더 낮았다. 자율주행 기능 탑재 전에는 에어백 작동 빈도가 80만 마일당 1회였던 반면, 탑재 후에는 130만 마일당 1회로 더 줄어들었기 때문이다[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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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후 자율주행차의 성능이 더 좋아짐에 따라서 더 많은 사고를 줄일 수 있을 것이고, 이에 따라 더 많은 목숨을 구하고, 더 많은 돈을 아낄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랜드연구소에서는 자율주행차의 안전 주행능력이 사람보다 10% 나은 상태에서 2020년부터 미국에 자율주행차를 도입할 경우 2070년까지 110만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어놓았다.

현재의 과도기적인 상황에서는 자율주행차의 기능을 사용하더라도 사람이 운전석에 앉는 것이 법제화되어 있다. 더 나아가 차량 내부에는 핸들과 페달 등이 장착된 운전자의 좌석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기술이 발전되고, 사회문화적인 변화가 일어나면서 자연적으로 운전을 직접 하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인간이 운전한다는 행위가 사회적으로 퇴화하여,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차량 내부에 운전석이 사라질 수도 있다.

혹자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사람이 운전대를 잡는 것이 미래에는 ‘불법’이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1, 2] 많은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결국 자율주행차의 사고 확률이 0%에 수렴하는 때가 온다면, 사람이 운전하면서 ‘생명을 위협하는 일’이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도 옳지 않은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패러다임의 전환 이후에는 현재 불법인 것이 합법이 되고, 현재 합법인 것이 불법이 된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기술의 발전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 윤리적인 문제, 사람들의 인식도 동반한다. 그런 전환 이후에는 현재의 원칙과 상식은 통용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자동차 인공지능에 대한 패러다임의 변화가 의료 인공지능에서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현재의 의료 패러다임 하에서는 인공지능이 의사를 대신해서 최종적인 의사결정까지 내린다는 것은 규제나 법적으로도 문제의 소지가 있어 보이며, 인간의 목숨을 온전히 기계에 맡긴다는 것이 매우 비윤리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의료의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뒤바뀐다면 현재 우리가 의료에 대해서 가지는 전제 자체도 바뀔 수 있다. 이는 의료 지식이나 진단 프로세스, 의사 결정 권한뿐만 아니라, 보험제도나 의료법 및 윤리와 같은 사회문화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수반할 것이다.

현재 인공지능이 의사를 배제한 채 의료적 의사결정을 내리게 하는 것은 불법일뿐만 아니라, 윤리적이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만약 특정 문제에 대해서 인공지능이 충분한 수로 이루어진 의사 그룹보다 더 높은 민감도와 특이도를 가지며, 더 일관적이고, 효율적인 데다가, 더 낮은 비용으로 의료적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 충분한 수의 환자에 대한 장기적인 임상 연구결과 증명된다면 어떻게 될까. 과연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 이후에도 인공지능의 결과를 바탕으로 인간 의사가 최종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이 의학적으로 타당하다고 볼 수 있을까. 더 나아가서 인간이 인간을 진료하는 것이 여전히 합법적이며, 윤리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고민해볼 문제다.

 

의사의 탈숙련화

최종 의사 결정권자로서의 의사의 역할에 대해서 고려해야 할 또 다른 부분은 바로 인공지능에 의한 의사의 ‘탈숙련화’의 가능성이다. 앞서 자율주행차에 비유하여 의료 인공지능의 영향을 설명했지만,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자율주행차가 차선을 바꾸거나, 브레이크를 밟고, 속도를 줄이거나 높이고, 방향 지시등을 넣을 때마다 매번 운전자의 허락을 받지는 않는다. 하지만 의료는 의사 결정에 대해서 의사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환자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판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FDA가 인공지능 인허가 과정에서 의사의 개입 여부를 평가하는 것도 이를 반영한다.

하지만 의사라는 ‘최후의 보루’가 있기 때문에 환자에게 위해가 적을 수 있다는 전제는 그 자체로 재고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전문성을 믿고 사용하는 보조적인 기술이, 나중에는 반대로 인간의 전문성을 약화시킬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을 소위 ‘탈숙련화(deskilling)’라고 부른다 [1, 2].

흔히 왓슨과 같은 의료 인공지능을 자동차 내비게이션에 비유하기도 한다.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 승용차에는 ‘정밀도로지도’와 같은 지도책 한 권 정도는 모두 가지고 다녔다. 내비게이션이 대중화된 이제는 이런 지도책 없이도 가장 빠른 길을 쉽게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운전자들은 예전보다 길이나 지리를 잘 알지는 못한다. 이 때문에 가끔 생각지도 못하게 엉뚱한 곳에서 길을 헤매기도 하고, 내비게이션에 너무 의지한 나머지 낭패를 보기도 한다. 실제로 필자는 내비게이션을 믿고 경기도의 한 시골길을 달리다가 길이 갑자기 끊기는 바람에 차가 논두렁에 빠져서 기중기로 들어 올려서 간신히 꺼낸 적도 있다.

‘탈숙련화’ 현상을 더욱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이 바로 비행기의 조종실이다. 자동 항법 시스템의 발달 덕분에, 비행기 조종사는 이제 이착륙 시 이외에는 거의 조종간을 잡지 않는다. 그 결과 조종실에 들어가는 인원도 크게 줄었다. 1940년대에는 두 명의 조종사 외에도 항공기관사, 항공사, 무선통신사 등 총 5명이 들어갔으나, 이후 점차 줄어들어서 1980년대 이후로는 두 명의 조종사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두 명의 조종사도 너무 많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는 사람의 수도 크게 줄었다. 1962년~1971년 사이에는 100만 명당 133명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으나, 이 숫자는 2002년~2011년에는 100만 명당 2명으로 줄어들었다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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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조종실은 자동화 도입 과정의 축소판이다

자. 그런데 무엇이 문제일까. 바로 이 과정에서 조종사들의 숙련도가 하락했다는 것이다. 즉, 오토파일럿 기능에 대한 지나친 의존이 조종사의 전문지식과 반사신경을 감퇴시키고, 집중력을 떨어뜨렸으며, 수동 비행 기술을 퇴화시켰다. 2013년 미국 연방항공국(Federal Aviation Administration)의 ‘조종석 자동화에 대한 광범위한 정부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일어난 사고 중에 절반 이상을 조종사들의 상황 인식 저하와 수동 비행 기술의 약화와 같은 자동화 관련 문제들과 연관지었다 [1, 2].

한 연구에서는 영국의 66명의 베테랑 조종사들을 모집한 후, 비행시뮬레이터에서 엔진이 폭발한 보잉 737기를 조종해서 악천후를 뚫고 무사히 착륙시키는 난이도 높은 조종을 시켜보았다 [1, 2]. 시뮬레이터에서는 비행기의 자동 시스템을 망가뜨렸기 때문에 조종사는 수동 조종을 해야 했다. 이 실험 결과 대다수의 조종사는 ‘용인’ 수준을 겨우 넘는 정도로 수동 조종에 서툴렀다. 특히 주목할만한 부분은 실험 직전 두 달 동안의 수동 비행시간의 양과 조종능력이 상관관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즉, 조종사들의 전문 기술을 지속해서 사용하지 않으면 결국 전문성이 퇴화한다는 의미이다.

비행기에 처음 자동 시스템을 도입할 때에도, 파일럿이라는 최후의 보루가 있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오토파일럿 기능에 문제가 있으면 수동으로 조종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동화로 인한 파일럿의 탈숙련화라는 변수를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처럼 의료 인공지능의 도입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의사들의 탈숙련화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법은 없다. 처음 도입될 때와는 다르게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의사들이 인공지능의 판단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게 되거나 의존도가 높아질 수도 있다. 또한, 의료에는 요양급여 등의 문제로 의사들이 인공지능의 판단에 반드시 따라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심평원에서 인공지능을 도입하여, 인공지능의 판단과 지나치게 다른 판단을 내리는 의사에게는 보험급여를 지급하지 않거나, 처벌한다면?) 이런 경우에 의사의 탈숙련화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의료 인공지능의 도입에 대해서 의사의 ‘유지될 역할’ 중에 최종 의사 결정권자의 역할을 논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의사가 의료 행위에 대한 결정을 내리고 그 책임도 지는 역할은 앞으로도 유지될 것이다. 최소한 현재의 패러다임 하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에 의한 의료, 사회, 문화, 윤리적 패러다임의 전환과 인공지능에 의한 의사의 탈숙련화 가능성에 대해서도 깊은 고찰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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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과정을 장기간 거치게 되면
의사의 탈숙련화 문제가 필연적으로 대두될 것이다. (출처: 동아일보)

 

인간 의사의 인간적인 일

의료 인공지능의 도입으로 인해 앞으로 유지, 혹은 더 강조될 또 다른 인간 의사의 역할은 바로 ‘인간적인 측면’이다. 의사들이 환자에게 줄 수 있는 공감 능력이나 감성적 측면과 같은 ‘휴먼 터치’이다. 환자들이 겪는 고통을 이해해주며, 위로해주고, 더 통합적인 의료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따뜻한 인간의 손길’을 가진 진료를 하는 것이다. 이는 환자의 마음, 환자의 고통, 환자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력이 필요한 부분이다. 더 나아가서 환자와 의사 사이뿐만 아니라, 의사와 의사 사이, 혹은 의사와 사회 사이의 관계 형성과 의사소통 능력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겠다.

의료 인공지능의 도입이 보편화될 미래에는 이런 역할이 더 강조될 것이 분명하지만 이런 역량을 함양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이를 가르치고 배우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더 문제는 현재의 의료 체계나 일선 진료 현장에서는 간과되고 있는 (혹은 현실적으로 고려하기 어려운) 부분이며, 심지어는 비과학적으로 들리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의과대학의 커리큘럼이나, 레지던트 수련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의대 교육과정에서는 의학적인 지식을 가르치고 기술적인 측면을 함양하는 것에는 노력을 기울이지만, 의료의 기능적인 측면 외에 환자를 인간 대 인간으로 대하고, 공감 능력이나 의사소통 능력 등 의료의 인간적인 측면을 계발하는 것에는 상대적으로 낮은 우선순위를 차지한다[ref]. 진료실에서 의사들은 많은 경우 환자를 한 명의 인간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증상의 집합체(amalgamation of symptoms)로 바라보는데 익숙하다.

공감이나 소통은 원래 그 자체로 어려운 일이다. 다른 사람을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서,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고 그 사람의 기쁨과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이 공감이다. 의사소통 능력도 마찬가지다. 때로 말하는 능력보다 듣는 능력이 더 필요하다. 병원은 공감과 소통이 더욱 필요한 공간이다. 누구나 환자가 되면 신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불안을 겪을 수밖에 없으며, 일상생활에서보다 더 많은 공감과 소통을 갈구하게 된다.

환자가 병원에서 공감과 소통을 원하는 가장 중요한 대상은 바로 의사이다. 하지만 의사는 이런 능력을 발휘할 시간적 여유도, 정신적 여유도 없고, 이를 위한 교육도 받지 못했다[ref]. 진료실에서 공감 능력을 더 발휘하고, 소통을 더 잘 해야 한다는 동기부여도 부족하다. 대학병원에서 의사들은 끊임없이 진료 실적의 압박에 시달리지만, 환자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더 해준다고 해서 수가를 더 받을 수 있는 구조도 아니다. 여기서 수가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공감 능력에 의사 개인의 역량뿐만이 아니라, 한국 의료 시스템의 구조적인 특성도 있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이는 추후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겠다.

 

나쁜 뉴스 전하기

의사의 공감 능력과 의사소통 능력이 가장 결정적으로 필요한 때가 바로, ‘나쁜 뉴스’를 전할 때이다. 대표적인 ‘나쁜 뉴스 전하기’의 예시는 바로 종양내과에서 의사가 환자에게 암에 걸렸다는 진단 결과를 전달하거나, 암의 재발 혹은 전이 등을 알려줄 때이다. 딥러닝으로 의료 데이터를 분석하여 암을 확인했다고 할지라도, 이 결과를 환자에게 전달하는 것은 인간이 해야 하고, 인간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종양내과와 같은 일부 진료과의 경우 의사들이 이런 역할을 더 자주 한다. 연구에 따르면 한 명의 종양내과 의사는 평생 환자에게 ‘나쁜 뉴스’를 2만 번 정도 전한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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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환자에게 이런 나쁜 뉴스를 어떻게 전하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환자를 인격체로 대하고 감정적인 위로를 전해야 한다는 윤리적 의미뿐만 아니라, 연구에 따르면 나쁜 뉴스를 전하는 방식에 따라서 환자가 질병을 대하고 치료를 받는 자세, 치료 중 느끼는 우울함의 정도와 심지어는 치료 결과까지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유방암 환자들을 5년 동안 관찰한 결과, 의료진과의 커뮤니케이션 만족도가 유방암 환자의 삶의 질 (quality of life)에 유의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피부암 환자들의 경우, 의사가 피부암 진단 소식을 어떤 방식으로 전하는지에 따라서 우울증이나 분노 장애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수준도 달라졌다.

또한 의사가 나쁜 뉴스를 전하는 유형에 따라서도 환자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게 달라짐을 증명한 연구도 있다. 의사의 커뮤니케이션 유형에 따라 환자들이 의사로부터 얻는 감정적인 위로, 의사에게 느끼는 위압감, 치료에 대한 희망, 얻는 정보의 양, 진료 만족도 등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또한 치료 후 느끼게 되는 불안감이나 우울함의 정도 역시 의사의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에 따라서 크게 달라졌다. 몇 가지 유형의 의사소통 중에서, 개별 환자의 반응과 감정 상태, 필요에 따라서 기민하게 의사가 반응하면서 정보도 전달하고 공감 능력도 적절하게 발휘하는 ‘환자 중심’ 유형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의사의 공감 능력이 치료를 좌우한다

그렇다면 의사의 공감 능력은 어떤 효과를 가질까. 의사가 공감 능력이 높을수록 환자의 불안감이 줄어들고 의사에 대한 신뢰도와 진료 만족도가 높아진다는 많은 연구가 있다[1, 2, 3, 4]. 미국의 존스홉킨스 대학 연구진은 유방암 환자와 건강한 여성을 대상으로 의사가 유방암 환자에게 상태를 설명하고 치료 방침을 결정하는 과정을 연출한 18분 길이의 비디오를 보여주었다. 여기서 한 그룹은 ‘일반’ 버전의 비디오를, 다른 그룹은 ‘공감’ 버전의 비디오를 보았다. 공감 버전은 다른 내용은 같았지만, 진료의 시작과 끝에 총 40초 동안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는 점이 달랐다.

  • (시작할 때) 어려운 상황인지 압니다만, 제가 늘 곁에서 힘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오늘 제가 환자분께 말씀드릴 때 혹시라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 마음 편하게 되물어주세요. 우리가 지금 함께 있고, 앞으로 닥칠 어려움도 함께 헤쳐 나갈 겁니다. 
  • (마칠 때) 힘든 상황이시겠지만 제가 늘 도와드리겠다는 점을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앞으로 모든 단계마다 제가 함께하겠습니다. 

이 짧은 40초의 추가적인 이야기만으로도, 연구에 참여한 사람들은 ‘공감’ 버전의 의사가 더 따뜻하고, 세심하며, 환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의사라고 평가했다. 또한 환자들이 훨씬 덜 불안해했고, 이 의사를 더 신뢰했다. (주: 이 연구는 청년의사 박재영 주간의 ‘개념의료 (청년의사, 2013)’에 설명된 부분을 재인용하였습니다)

의사의 공감 능력은 이렇게 의사와 환자의 관계 형성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서 환자의 치료 결과를 좌우할 정도로 중요하다. 이는 언뜻 비과학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지만, 대규모 임상연구를 통해서 의학적으로 증명된 결과이다 [1, 2, 3]. 제퍼슨 의과대학의 조셉 고넬라(Joseph Gonnella) 교수의 연구팀은 두 번의 연구에 걸쳐서 이를 보여주었다. 891명의 당뇨병 환자를 대상으로 한 2011년 연구에서는 공감 능력이 높은 의사에게 진료받은 환자들이 혈당의 관리(당화혈색소 기준)도 잘 되었으며, 나쁜 콜레스테롤(LDL-C)의 수치도 낮았다. 의료진의 공감 능력 이외에 의료진과 환자의 성별, 보험 등의 여부는 차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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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능력이 높은 의사에게 진료받은 당뇨병 환자의 혈당과 콜레스테롤 수치가 더 좋았다[ref]

또한 2만여 명의 당뇨병 환자를 대상으로 한 2012년 연구에서도 역시 공감 능력이 낮거나 보통인 의료진에 비해서, 높은 공감 능력을 갖춘 의사에게 진료받은 환자가 합병증이 덜 발생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공감 능력이 낮거나 보통인 의료진에게 진료받은 경우 급성 대사 합병증이 발생한 당뇨병 환자가 각각 1000명당 6.5명, 7.1명이었던 반면, 공감 능력이 높은 의료진에게 진료받은 경우 1000명당 4.0명의 환자만 합병증이 발생했다. 이 연구에서도 의료진의 공감 능력 이외의 다른 변수들은 환자의 치료 결과를 유의미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jefferson공감 능력이 높은 의사에게 진료받은 당뇨병 환자에게 합병증이 덜 발생했다[ref]

의사들의 공감 능력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부족한 경우 의료 사고의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으며, 더 나아가 의사의 공감 능력은 결국 의사들 본인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주장도 있다. 의사가 환자에게 공감하는 것은 결국 반대로 환자가 의사에게도 공감하게 되어 긍정적인 피드백 순환을 일으킴으로써 의사들의 번아웃(burn-out)을 줄여준다는 것이다[ref].

 

의사의 낮은 공감 능력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의 의사들은 환자와 어떻게 의사소통하고, 공감하며, ‘나쁜 뉴스’를 어떻게 전할지에 대해서는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한다. 의대에서 의학적인 지식을 학습하고,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방법은 배우지만, 환자에게 이러한 소식을 어떻게 전하며 충격을 받은 환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한 훈련은 간과되고 있다 [1, 2]. 이런 커뮤니케이션 훈련을 받은 종양내과 전문의는 전체의 5%에 지나지 않는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그 결과 의사들은 환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의학적인 용어로만 가득 찬 설명을 하거나, 정보를 지나치게 적게 혹은 많이 주거나, 환자가 필요로 하는 만큼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거나, 환자에게 헛된 희망을 주거나 혹은 불필요하게 불안감을 키우는, 좋지 못한 의사소통을 하게 된다 [1, 2].

그렇다면 실제로 진료실에서 발휘되는 의사들의 공감 능력은 어느 정도 수준일까? 이와 관련하여 미국에서는 종양내과 의사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발표된 바 있다. 암 환자와 종양내과 전문의가 진료실에서 하는 대화를 녹음하고 분석해서, 환자의 이야기에 의사가 공감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총 몇 번이나 있었는지, 그리고 그중에서 실제로 의사가 몇 번이나 공감 능력을 발휘했는지를 측정한 것이다.

이런 연구에 따르면 종양내과 의사가 진료실에서 실제로 공감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총 열 번 중에 ‘한 번’, 혹은 ‘두 번’ 정도에 그친다 [1, 2]. 2007년 임상 종양학 저널(Journal of Clinical Oncology)에 발표된 연구에서는 270명의 암 환자를 진료하는 종양내과 의사 51명의 진료실 녹음 파일 398개를 분석했다. 이 대화 중에는 의사가 공감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총 292회가 등장하는데, 의사는 이 중 22%의 경우에만 반응했다. 그런가 하면, 2008년 발표된 ‘폐암 환자들의 대화에서 놓치는 공감의 기회 (Missed Opportunities for Interval Empathy in Lung Cancer Communication)’라는 제목의 연구에서는 폐암 환자 137명과 의사들의 대화를 분석한 결과 384번의 공감 능력 발휘 기회 중에서 실제 의사가 공감을 표현한 경우는 10% 수준인 39번에 그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진료실에서 의사들이 환자에게 거의 공감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결과다. 의사들이 환자에게 공감이 필요한 순간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거나, 혹은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유로 그 기회를 대부분 날려 먹고 마는 것이다. 이 두 연구는 미국에서 행해졌지만, 국내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 인공지능에 대비해서 인간 의사가 가질 수 있는 중요한 장점 중 하나가 인간적인 공감 능력이며, 이 공감 능력이 환자의 치료 결과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을 고려하면 이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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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의사는 공감 능력이 낮을까

진료실에서 환자를 진료할 때 의사의 공감 능력은 왜 이렇게 떨어질까? 원인을 알아야 문제의 해결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마도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정도의 가설을 세워볼 수 있을 것이다.

  • 가설 1. 원래부터 공감 능력이 부족한 학생들이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 가설 2. 의대 교육과정과 전공의 수련을 거치며, 공감 능력이 줄어들었거나, 발휘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 가설 3. 지금도 의사의 공감 능력은 충분하지만, 현재의 진료 환경에서는 제대로 발휘되기가 어렵다.

위와 같은 세 가설 중에 어떤 것이 타당한지 알기 위해서는 더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세 가지 가설 모두가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가설 1의 경우, 수능 성적이 공감 능력과의 상관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 수능 점수 최상위권 학생만 의대에 진학할 수 있는데, 수능에서는 지적인 능력만 평가하기 때문이다. 또한 의대 입시에서 정량적 성적 외에 인성 면접 등이 심도 있게 치러지지 못한다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가설 2는 좀 더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강조하였다시피 현재의 의과대학 교육 과정에서는 의학 지식과 기술적인 측면의 발전에는 큰 노력을 기울이지만, 의료의 인간적 측면을 계발하고 환자의 감정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교육은 부족하다. 흥미롭게도 이에 관한 연구 결과가 있다. 미국의 의과대학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는 과정에서 학생들의 공감능력이 감소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1, 2]. 특히, 학생들이 강의실을 벗어나서 환자 실습을 시작하는 3학년 때 공감능력이 급격하게 감소한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해당 논문에서는 수련 과정과 환경에서 오는 스트레스, 과중한 교육과정, 환자 진료 시에 마주하는 ‘현실’, 롤 모델의 부족 등을 원인으로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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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의대 과정 중 3학년 때 공감능력이 급격히 감소한다 [ref]

다만 최근에는 이러한 의사의 공감능력의 중요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암 환자를 치료하는 종양내과나 완화 의료 등의 분야에서는 이런 측면이 강조되고 있고, 외국에서도 듀크 대학병원의 ‘온코토크(OncoTalk)’ 나 매사츄세츠 종합병원의 ‘엠파테틱스(Empathetics)‘, 콜롬비아 대학의 ‘내러티브 의학(narrative medicine)’ 와 같은 프로그램이 생기고 있다. 예를 들어, 콜롬비아 대학의 내러티브 의학 과정은 ‘문학’을 통한 의학 교육으로 의사는 질병과 관련된 환자의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해석할 줄 아는 서사 능력(narrative competence)를 함양하게 된다 [1, 2, 3, 4]. 컬럼비아 의과대학 학생들은 이 과정의 수업을 필수적으로 수강해야 한다. 하지만 국내 의과대학에서는 아쉽게도 이런 교육은 아직 많이 찾아보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한국에서는 2010년부터 의사국가고시에서 의학 지식이나 술기뿐만이 아니라, 모의 환자를 대상으로 의사로서 전반적인 진료 능력을 평가하는 CPX(clinical practice examination) 부문이 추가되었다. 표준화 환자 (standardized patient, SP)를 대상으로 예비 의사들의 일차적인 진료 능력을 평가하는 것이다. 응시생들은 모의 환자에 대한 상황을 부여받은 후에, 10분간 진단, 처방, 교육까지 마쳐야 한다. 보통 전문 배우들이 모의 환자의 역할을 하는데, 진단을 말하면 환자가 펑펑 울거나 화를 내는 등 다양한 반응을 보이고, 응시생들은 환자의 반응에 맞게 적절하게 대처하면서 진료를 마쳐야 한다. 의대생들은 이렇게 실제와 같은 환경에 처하는 경우가 처음이기 때문에 많은 경우 당황하곤 한다.

의사국가고시에 이런 부문이 추가되었다는 것 자체는 긍정적이지만 (2010년 이전에 국시를 통과한, 즉 현재 진료하는 의사는 대부분 이런 실기 시험을 거치지 않았다) 이런 교육이 좀 더 체계적으로 제공될 필요가 있다. 현재는 의과대학에서 의사가 환자를 대하고, 의사소통하고, 공감하는 체계적인 교육과정을 제공하기보다는 개별 의과대학 자체적으로나, 혹은 시험을 준비하는 의대생들끼리 서로 번갈아 가면서 역할극을 하는 정도로만 준비한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교육과 평가는 국가고시에서 일회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의사 자격 취득 이후, 혹은 레지던트 수련과 전문의 취득 이후에 환자를 진료하면서도 지속해서 이뤄져야 할 것이다.

가설 3은 더욱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의사들이 충분한 공감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할지라도, 현재의 의료 시스템과 진료 환경에서는 그 능력이 발휘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는 미국과 한국의 차이를 지적해야 한다. 미국에서는 한 명의 환자를 20분 이상 진료하는 경우도 많다. 그에 비하면 한국은 소위 ‘3분 진료’가 일상화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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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처럼 진료 시간이 충분한 경우에도 의사들이 공감 능력을 열 번에 한두 번 정도로 거의 발휘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진료 시간이 3분으로 훨씬 부족한 경우는 어떨까. 공감 능력이 충분한 의사라고 할지라도 이를 마음껏 발휘할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을 것이다. 앞서 소개한 연구에서처럼, 진료 시작과 끝에 40초의 공감 언어를 추가하면 의사-환자 관계에 큰 효과가 있다고 하였지만, 한국의 진료 환경에서 40초는 너무도 긴 시간이다.

해묵은 의료 수가 이야기를 사실 여기에서도 꺼내지 않을 수가 없다. 많은 의료 전문가들이 동의하듯, 한국에서는 의료 수가가 낮기 때문에 더 많은 환자를 진료하지 않으면 병원 경영을 유지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즉, 병원의 입장에서 충분한 수가를 받기 위해서는 의사가 환자를 한 명이라도 더 진료하는 수밖에 없다. (특히 대학병원에서) 의사는 환자를 더 많이 봐야 한다는 진료 실적의 압박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이러한 3분 진료의 환경에서는 의사들에게 공감 능력을 발휘하라는 주문이 무리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의사의 의사소통, 공감 능력의 발휘, 의료의 인간적인 측면이라는 문제는 의사 개인의 역량과 교육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처럼 의료 체계의 구조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이 부분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인공지능의 도입에 대응하여 한국에서는 3분 진료를 계속해야 하는 의사는 ‘인간적인 강점’을 발휘하기가 어려우므로 외국의 의사에 비해서 불리한 입장에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인공지능 덕분에 진료 효율이 크게 높아져서 비로소 진료 시간에 지금까지는 없었던 여유 시간을 확보하게 될 수도 있다. 이때 한국의 의사들이 이러한 시간을 환자와의 효과적인 의사소통, 관계 형성, 공감 능력 발휘 등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준비도 필요할 것이다.

 

기초 의과학자의 역할

의료 인공지능의 도입에 따라서 앞으로 유지 및 강조될 인간 의사의 또 다른 역할은 바로 기초 의과학자로서의 역할이다. 우리는 의료 인공지능에 대해서 약한 인공지능, 특히 기계 학습에 의한 약한 인공지능을 지금까지 논의를 진행해왔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약한 인공지능은 한 가지 종류의 문제만을 풀도록 고안된 인공지능이며, 자의식이 없고, 스스로 무엇을 할지 판단하지는 못한다. 또한, 기계학습 방법의 경우에는 반드시 문제를 푸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는 학습 데이터가 필요하다. 즉, 기존에 학습할 데이터가 없고, 문제가 정의되어 있지 않은 완전히 새로운 영역에 대해서는 인공지능을 근본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

인간이 기존의 지식이나 지적 역량으로 도달하지 못한 곳을 헤쳐 나가는 것이 바로 연구다. 강한 인공지능이라도 개발되지 않는 한, 완전히 새로운 영역에서 인공지능이 학습하고, 문제를 풀 능력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그 미지의 분야를 인간이 먼저 연구해야 한다. 아직 원리나 치료법이 밝혀지지 않은 질병, 정량적으로 나타내기 어렵거나, 환자의 수가 많지 않고, 질병의 유형이 지나치게 세분화되어 있어서 충분히 데이터가 쌓이기 어려운 질병 등이 특히 인공지능의 접근이 어렵고, 이는 의과학자들이 계속 연구를 해야 하는 부분이다.

의사의 역할 중에 앞으로 더 강조될 역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기초 의과학자로서의 역할이다. 사실 현재의 의료 체계에서는 진료나 치료 등 임상 의학을 하는 의사들의 수가 상대적으로 많고, 의과대학이나 전공의 수련 시스템에서도 임상의사를 키우는 데 집중하고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기초 의과학자라는 역할은 간과되곤 한다. 하지만 의학은 과학이며, 의학을 하는 의사는 엄연한 과학자이다. 의과학의 연구에서는 이렇게 의과학자로서의 의사의 역할이 중요하다. 임상의사로서의 역할이 인공지능의 영향을 상당히 받을 미래에는 이런 의과학자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생물학, 화학 등의 전공자도 기초 의학을 연구할 수 있지만, 이 분야에서 임상 지식을 지닌 의과학자의 기여는 필수적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런 기초 의과학자로서의 의사가 고사 직전에 이르렀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2015년 대한의학회의 발표에 따르면 해부학·생리학·약리학·미생물학·생화학·기생충학과 같이 전문의제도가 없는 6개 기초분야의 경우에 이런 현상이 특히 심하다. 이 분야의 교수 중 의사 비율이 평균 50% 내외이며, 향후 15년 이내에 의사 기초 의학자의 3분의 2인 323명이 은퇴할 예정이지만, 45세 미만인 의사 기초 의학자는 전국 60명을 넘지 않는다고 한다[1, 2].

또한 기초 의과학자로서의 역량 대신 임상의사만을 길러내는 의과대학의 교육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대한생리학회 회장인 박병림 원광의대 교수는, “현재 대부분의 의대는 일차 진료 의사 양성을 교육 목표로 설정하고, 임상 의학 위주로 통합강의를 진행하면서, 기초 의학 강의와 실습이 자연스레 축소돼 과학적 사고 능력 개발이 멀어지게 된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이렇게 의료 인공지능 도입의 영향을 어떠한 방향에서 접근하더라도, 이렇게 의과대학 교육 변화의 필요를 지적하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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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he Author

디지털 헬스케어를 통해 의료를 혁신하고 세상을 더 건강하게 만들고자 하는 벤처투자자, 미래의료학자, 에반젤리스트입니다. 포항공대에서 컴퓨터공학과 생명과학을 복수 전공하였고, 동대학원에서 전산생물학으로 이학박사를 취득했습니다. 스탠퍼드 대학, 서울대학교병원 등에서 연구하였습니다. 현재 디지털 헬스케어 스타트업 전문 투자사, 디지털 헬스케어 파트너스 (DHP)를 2016년에 공동창업하였고,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여 개의 디지털 헬스케어 스타트업에 투자하였습니다. 네이처의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 자매지 『npj 디지털 메디슨』의 편집위원이자, 식약처, 심평원의 전문가 협의체 자문위원입니다. 『디지털 헬스케어: 의료의 미래』 『의료 인공지능』 『헬스케어 이노베이션』 등을 집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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